007은 두 번 산다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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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은 두 번 산다

2020.11.05

지난 10월 31일(영국 현지 시간)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원조 제임스 본드 숀 코네리(Sean Connery, 1930~2016)의 부음을 듣고 아쉬운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지난 6월에는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세상을 등졌죠. 중학교 저학년 때 망연자실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게리 쿠퍼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서였습니다. 게리 쿠퍼는 로버트 테일러, 버트 랭카스타와 함께 자천타천 ‘할리우드 키드’였던 그 무렵 필자의 마음속 3대 우상이었거든요.

스코틀랜드 출신의 명배우 숀 코네리는 테렌스 영 감독이 이안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007 위기일발(애인과 함께 소련서 오다‧From Russia With Love)>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영화 포스터 (구글 이미지)

영화는 1965년 피카디리 극장에서 상영했죠. <007 위기일발>은 <007 살인번호(Dr. No)>를 잇는 시리즈 2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소개되었고, 이후 007 시리즈 붐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007 시리즈 중 역대 최고의 영화로도 꼽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런 영화가 다 있다니! 오프닝 시퀀스부터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예상을 뒤엎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멜로디(작곡 존 배리, 노래 매트 몬로)가 장중하게 흐르며 애상에 잠기려던 차, 총구를 형상화한 회오리치는 동그라미 속을 오가던 신사가 돌연 관객을 향해 총을 겨누질 않나, 화면의 출렁거림에 맞춰 기기묘묘한 자태로 여체가 흐느적거리질 않나…. 사람의 몸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살짝 이른 나이에 깨쳤습니다.

놀람을 안겨 준 요소는 그밖에도 많았습니다. 지성과 야성의 쌈박한 조합인 주인공 숀 코네리의 매력이야 더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만, 주인공 못지않은 강단을 보여준 빌런(악당) 로버트 쇼의 카리스마, 시계, 만년필 같은 소지품을 활용한 최첨단 호신무기 등등. 날틀(헬리콥터)과 사람의 아슬아슬한 숨바꼭질(1:1 데스 매치)은 또 어떠했던가요. 뇌쇄적인 본드걸의 등장도 ‘당근’ 빼놓을 수 없습니다. <007 위기일발>에서는 다니엘라 비안키가 출연해 매력을 과시했지만, 원조 본드 걸은 <007 살인번호>에 나오는 우술라 안드레스였어요.

위 두 여배우의 등장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당시 조숙한 편인 필자의 취향이 데보라 카, 그레이스 켈리 같은 고상하고 우아한 청순가련형 배우에 머물렀다가 시나브로 실바나 망가노('시집 가가나 말거나') ‘지나 롤로브리지다('허리가 부러지다') 같은 대중성을 갖춘 개성파 여배우로 옮겨온 터였어요. 007 시리즈에 출연한 두 여배우도 은근슬쩍 좋아하는 목록에 끼워넣었답니다. 역대 본드걸을 떠올리면 탄식이 절로 납니다. 당대 여신급 외모의 글래머러스한 배우들이 다수 출연했거든요. 질 세인트 존, 소피 마르소, 킴 베이싱어, 할 베리, 에바 그린, 모니카 벨루치, 레아 세이두….

숀 코네리 이야기를 하다 그만…. 숀 코네리는 위 두 영화를 포함해 <007 골드 핑거> <007 썬더볼 작전> <007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상 초기 6편에 출연합니다(<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은 정규 시리즈가 아니어서 열외). 이후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을 거쳐 다니엘 크레이그가 6대 제임스 본드 역을 맡고 있죠. 007 역을 맡은 배우 중 숀 코네리가 으뜸이라는 점에는 영화전문가와 일반대중의 의견이 대체로 합치합니다. 007 고유의 캐릭터에 유머 감각을 갖춘 로저 무어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고, 요즘 젊은 층엔 다니엘 크레이그가 훨씬 더 친숙할 수도 있겠지만요.

2000년대에 들어서며 <007> 시리즈는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치밀한 구성과 리얼 액션을 내세우는 <본> 시리즈, 최첨단 스턴트 액션을 보여주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선보인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같은 신종 첩보물에게 자리를 내주었지요. 악당은 전 세계 네트워크를 실시간으로 장악하며 시대 트렌드를 선취하는데, 본드는 무늬만 신형인 결함투성이 애스턴마틴을 운전하거나, ‘시계태엽 속의 오렌지(폭탄)’를 투척하며 맨몸으로 때웁니다. 그에 더해 노쇠한 본드의 과거가 범죄조직(스펙터)에 저당 잡혀 있기도 하군요. 조심해 본드, 너 그러다 권총(월터 PPK) 뺏기고 살인면허 취소당하는 거 아냐?

강렬하고 야성적이면서도 신사적인 면모를 갖춘 숀 코네리는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 출연 후 MI6(영국대외정보국)을 대령으로 퇴사하고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007 캐릭터에 얽매이면 연기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지요. 손 코네리의 판단이 옳았던 듯도 합니다. 이후 숀 코네리는 액션 및 성격배우로 거듭납니다. 숀 코네리의 굵직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살펴보죠. <머나먼 다리> <대열차 강도> <바람과 라이언> <장미의 이름> <붉은 10월> <에덴의 마지막 날> <함정> <카멜롯의 전설> <더 록> <엔트랩먼트> <파인딩 포레스트>…. 숀 코네리가 제임스 본드였던 거 맞나요?

이 글을 쓰는 지금 눈앞에 코로나19로 기피 시설이 된 카지노장이 펼쳐지며, 나비넥타이를 맨 섹시한 중년 남자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차림새로 들어서는군요. 장내를 소오(笑傲)하더니 음료를 주문합니다. “보트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중후한 음성으로 자기소개도 곁들입니다. “마이 네임 이즈 본드, 제임스 본드(My name is Bond, James Bond)." ‘코네리 형’이 벌써 그립습니다. 코네리 형, 어서 돌아와요. 007은 두 번 산다잖아요!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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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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