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인 법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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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 법

2020.11.02

“대검을 저격하라.”
추미애 법무장관이 지난달 21일 대검찰청 국정감사를 하루 앞두고 한 폭탄발언입니다. 자신의 ‘명(命)을 거역한’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어 명줄을 놓게 만들라는 선동으로 들립니다. 특정 목표만을 겨냥하여 총을 쏘거나 습격함을 뜻하는 저격(狙擊)은 일반적으로 전쟁터에서 원거리에 있는 적 지휘관을 조준 사살하는 것을 일컫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링컨·케네디처럼 국적(國敵) 또는 정치적 갈등·대립관계에 있는 사람을 총격하는 경우에도 쓰입니다. 어떤 경우든 저격의 대상은 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현대 국가의 정부는 적대관계에 있더라도 공식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희생하는 정책·정략은 금기로 삼고 있습니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인권(人權)은 존중해야 한다는 금과옥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는 부처의 수장이 특정 조직을 저격하라고 한 표현은 상식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표류든 월북이든 김정은 정권이 우리 국민을 총격 살해한 사건이 기억에 생생한데, 우리나라 안에서 우리 국민, 그것도 고위 공직자 간에 저격 운운하는 것은 충격 이상의 전율(戰慄)을 실감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 유럽선 위험에 빠진 사람 구조 않으면 징역형

유럽 국가에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Good Samaritan Law)’이 있습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구조 불이행(Failure to Resque)을 처벌하는 것을 통칭하는 법규로 구조 거부죄 혹은 불구조죄라고 부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人)의 선행에 비유한 법으로, 프랑스·독일·스위스·폴란드·핀란드와 러시아까지도 실정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의무에 법적 책임을 물어 강제하는 이들 나라의 법은 위법 때 3~5년의 징역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는 취지의 ‘호인법(好人法)’을 만들어 3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호인법은 착한 사마리아인 법처럼 강제성은 없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다 뜻하지 않게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더라도 민사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법이 만들어진 것은 2006년 난징(南京)에서 일어난 ‘펑위(彭宇)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펑위는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에 떠밀려 넘어진 할머니를 부축해 병원까지 모셔다 드렸으나, 오히려 가해자로 몰려 치료비의 40%(4만 위안, 678만 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펑위의 봉변은 ‘남의 일에 괜히 나서지 말라’는 관행을 부채질했고, 이후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일이 자주 생겨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범죄행위를 보고도 외면해버리는 사람을 중국에서는 웨이관(圍關; 방관자)이라 부릅니다. 지난달 21일 웨이보(微博)에는 한 누리꾼이 ‘길거리에서 여성이 맞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다’는 게시글을 올리자, “잘 했다. 도와줘 봐야 번거롭기만 하다”는 댓글이 수없이 달렸다고 합니다. 2년 전에는 고교 담임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간쑤(甘肅)성의 한 소녀가 도심 백화점 8층에서 투신하려 했습니다. 밑에서는 군중들이 SNS에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가 하면, “빨리 뛰어내려라”고 야유까지 했습니다. 소방대원이 긴급투입 됐으나 소녀는 끝내 몸을 던졌습니다.

  # 방관 만연한 중국도 好人法으로 민사책임 면제

웨이관 문화의 극치는 ‘44번 버스’ 사건입니다. 1999년 중국 시골길에서 한 청년이 2시간을 기다린 끝에 버스를 탔습니다. 얼마 뒤 버스에 탄 두 승객이 강도로 돌변해 탑승객들을 위협하며 금품을 갈취했습니다. 심지어 여성 운전사를 밖으로 끌어내 강간하려는 강도를 말리려다 청년은 칼을 맞고 다리를 다쳤습니다. 이 청년이 힘겹게 다리를 끌고 와 버스에 오르려 하자 성폭행을 당한 운전사는 “당신은 타지 마!” 소리 지른 뒤, 경멸하는 눈으로 시종 방관만 한 승객들을 돌아본 후 차를 몰았습니다. 청년은 얻어 탄 다른 차로 한참을 가다 계곡에 추락한 사고 버스를 목격했습니다. 자신이 좀 전 탔던 바로 그 44번 버스였습니다.

‘44번 버스’는 2001년 홍콩에서 11분짜리 단편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고, 우리나라에도 쇼킹한 스토리가 널리 퍼졌습니다. 영화는 많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여성 운전사는 자신을 도우려 했던 청년을 살리려고 매몰차게 승차를 거부하고, 범죄를 외면한 승객과 강도를 태운 채 극단의 길을 택했습니다. 양심과 저항 대 악행과 방관의 잣대로 삶과 죽음의 길을 갈라놓았습니다. 전쟁의 어느 순간보다 극렬한 심화(心火)와 참담함 속에서도 운전사는 악을 청소하겠다는 결기를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사감(私感)을 정의로 승화시켰다고 할까.

이 사건에 비추어 추미애 장관의 저격 발언은 과연 검찰총장이 ‘기망한’ 국민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현 정권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충성심의 발로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추 장관은 앞으로도 싸움닭이나 저격수 노릇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더 독한 말로 아무도 써 보지 않은 대하(大河)소설을 쓸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격 발언과 잦은 감찰에 저항하는 검사군(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슴니다.
타국과의 전쟁은 영웅을 낳을 수 있지만, 자국 내의 내분은 간웅을 낳을 뿐이라는 역사적 교훈도 새겨들었으면 합니다. 경청(傾聽)하고, 목계(木鷄; 어떤 싸움닭이 덤벼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 닭)처럼 의연해야 명(命)에 영(令)이 서는 겁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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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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