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에 ‘미친’ 사람들 [임종건]



www.freecolumn.co.kr

인수봉에 ‘미친’ 사람들

2020.10.27

지난 13일~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토포하우스 갤러리에서 ‘인수봉 얼굴’ 사진전시회가 열렸다. 한신대 개교 80주년기념특별전으로 열린 이 전시회는 인수봉에 미친 3인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기묘한 인연이 만들어 낸 자리였다.
전시회에는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사진기자로 활약하다 은퇴 후에도 사진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전민조(田敏照·76)씨가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50년 넘게 찍어온 인수봉 사진 30여 점이 걸렸다.
이 전시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지난 3월 종로구 안국동 담 갤러리에서 열린 ‘전민조, 인수봉 - 바위하다’ 전시회였다. 산악인이자 시인 겸 소설가인 박인식 씨(69)의 바위에 관한 시에 전민조 작가의 인수봉 사진들을 곁들인 ‘시사전(詩寫展)’이었다.

‘바위하다’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 먼저 산과 바위로 인연이 되어 친구가 된 박 시인과 서지학자 유시건 씨가 전시 몇 달 전 만났다. 박 시인이 시에 어울리는 바위그림이나 사진을 찾고 있다고 하자 유 씨가 안 주머니에서 항상 보물처럼 지니고 다니던 사진첩을 꺼냈다. 사진첩의 사진들은 그가 전민조 블로그에서 발견해 자신의 카메라로 찍어 복제한 인수봉 사진들이었다. 박 시인은 사진의 출처가 전민조 블로그라는 소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박 시인도 전 작가와는 산이 인연이 되어 이름은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인수봉 얼굴' 전시회를 마치던 날
인사동의 카페에서 전민조 작가(왼쪽)를
만나 3인의 인연을 들었다

전 작가는 소장품 중에 15 점을 이 시사전에 무료로 내주었다. 인수봉은 오래 두고 찍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지, 사진집이나 전시회는 생각지도 않았던 전 작가로선 뜻밖의 계기로 전시회를 연 셈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인연이 더 보태졌다.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전시회 예고기사가 한신대 연규홍 총장(60)의 눈에 띄었다. 개막식 날 담 갤러리를 찾은 연 총장은 이들 3인의 인수봉에 얽힌 사연과 함께, 전 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1만 점이 넘는 방대한 인수봉 사진 얘기를 듣게 됐다.
수유리 인수봉 자락에 있는 한신대 출신의 연 총장은 대학 입학하던 날부터 인수봉을 자신의 ‘큰바위 얼굴’로 삼아 꿈을 키웠고, 그래서 아호도 ‘바위’로 지은 터였다. 그가 인수봉 사진으로 10월의 개교 80주년 기념전시회를 열기로 한 결정은 우연 같은 필연이었다.
전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34점의 인수봉 사진을 한신대에 기증하기로 했다. 2016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었던 자신의 사진전 출품작 200여 점을 박물관에 기증한 이후 두 번째의 기증이었다.
이들 3인의 ‘인수봉 사랑’은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먼저 전민조 작가는 내가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했을 때 이미 이름을 날리던 사진부 기자였다.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볼 적마다, ‘민첩하게 비추다(찍다)’라는 ‘민조’의 뜻이 주는 연상작용 때문이었을까, 그가 타고난 사진기자이겠거니 생각했었다.
한국일보에 그가 찍은 사진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릴 적이면 나는 그의 피사체를 대하는 독특한 시각에 감탄하면서 나의 이름풀이가 그럴듯함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1975년 동아일보로 옮겨 1998년까지 활약하다 은퇴했다.

그가 인수봉에 미친 사람인 것을 안 것은 10여 년 전 그와 북한산에 오르면서였다. 사진기자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온갖 사진을 찍은 그였지만 북한산에 오는 것은 오로지 인수봉을 찍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군 입대 전인 1964년 인수봉을 처음 대했을 때 그 위엄 앞에 숨이 멎는 듯이 압도당한 기억으로 인해, 제대 후 사진기자가 되어 틈나는대로 인수봉을 찍기 시작했다. 인수봉과 온전히 하나가 되려고 그는 등반학교에서 암벽등반을 익힌 뒤 모든 등벽루트를 100회 이상 섭렵했다.

인수봉에 소나무 암각화를 새기듯 찍은 작품

사진들을 보면 그는 전 시간, 전 방향, 전 각도, 전 채색으로 인수봉을 렌즈에 담았음을 알 수 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꼭대기에서 밑에서 옆구리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안개가 끼나, 새벽이건 어스름이건 한낮이건 한밤이건 그의 시선은 인수봉에 꽂혀 있었다.
그에게 인수봉은 언제부턴가 생물체였다. 눈 코 입과 귀가 있고, 암벽의 틈새들은 핏줄이었다. 바위 속에는 오장육부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인수봉에 대한 집착은 부인에게는 큰 걱정거리였다.
꿈에 석양을 찍고 있었다. 산 밑으로 사라지는 태양을 가슴졸이며 찍고 있던 순간 거대한 바위가 열리며 광채가 쏟아졌다. 부인에게 꿈 얘기를 하니 “미쳐가는 꿈 같다”고 했다. 그는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병원으로 정신과 진찰을 받으러 간 적도 있었다.
진찰을 끝낸 의사에게 부인이 “이 사람 이상하죠?”라고 물었다. 의사가 “이상이 있기를 바랐나요? 이상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해서 웃었죠."

박 시인은 산과 바위를 사랑하는 산 사람이다. 산에 관한 잡지의 기자도 했고, 발행인도 했다. 그의 시와 소설도 산과 바위에 관한 것뿐이다. 그에게 인수봉은 이 나라의 ‘어미바위’이다. 그는 인수봉을 이렇게 읊었다.

‘나의 인수봉은/억년 세월로 자라난 견고한 무덤/청춘의 낭떠러지 꽃잎으로 떨어진 그대/상석 제물로 올려질/내 추락의 살점을/티벳의 독수리가 /히말라야 설산으로 물어나르는/조장(鳥葬)의 꿈/쩡쩡 별빛이 얼어붙는/만년설/절대고독을 넘는 그/새들의 하얀꿈-인수봉 1’

그는 인수봉의 외귀 바위에서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보았다. ‘고흐의 얼굴/그 예술혼의 얼굴/인수봉 큰바위 얼굴/고흐, 그림하다/예술혼하다/산꾼, 인수봉하다/바위혼하다 - 예술혼 또는 바위혼’
 

인수봉의 외귀 바위. 시인 박인식은 전민조의 이 작품에서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보았다.

인수봉을 300회 넘게 등반한 서지학자 어산(於山) 유시건의 인수봉 사랑은 ‘중독’이었다. 42세 때인 1987년 잘 다니던 한국정신문화원을 그만두었다. 더 늙으면 체력적으로 인수봉을 오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말의 혼잡 속에서가 아니라 평일에 혼자서 고즈넉이 인수봉을 바라보고 어루만지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인수봉에 관한 것이라면 시서화(詩書畵)를 가리지 않고 사들이거나 복제한 인수봉 수집광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2005년 인수봉 등정 200회를 기록한 데 이어, 2009년에 300회를 기록했다. 그는 회갑 년이기도 했던 2005년 200회 등정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희게 빛나며 하나로 우뚝 솟은 인수는 내가 사랑하는 님이요, 토템이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고달픈 몸에 원기를 채워주었고, 마음의 속진을 씻어주었습니다. 1987년 마흔둘 바위하기에는 늦은 나이에 그와 한 몸이 되기 시작하여, 회갑을 맞이한 2005년 3월까지 200회 오름에 이르도록 나를 받아준 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처음과 같이 이제와 앞으로도 계속 나를 받아주소서 인수여! 나의 님이여, 영원하소서! 2005 3 23’

어산은 ‘인수봉 - 바위하다’ 전시가 끝나던 지난 3월 15일 전 작가와 박 시인을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그리고 1주일 뒤 홀연히 세상을 떴다. 그가 그토록 사무치게 연모했던 인수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향년 75세였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주간한국,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