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도 [홍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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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도

2020.10.20

두어 달 전 자유칼럼그룹의 임철순 공동대표가 몇 자를 던져 주었습니다. “노래만 하지 말고 글씨도 쓰면 어떤가?” 아마도 내가 금년에 쓴 글 두어 편에 음악이라는 소재를 반복해서 다룬 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려니 짐작했습니다. 답은 간단히 했습니다. “내게 글씨 쓰기는 끔찍한 일입니다.”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글씨 쓰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요약해서 고백하면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쯤 숙제하느라고 공책에 글쓰기를 하는데 누군가가 글씨를 못 쓴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글씨를 읽을 수 있으면 되지, 잘 쓰고 못 쓰고가 어디 있어?” 그러다가 3학년 1학기 첫날 일기(일기 쓰기도 숙제입니다)에는 단 한 문장을 썼습니다. “올해는 글씨를 잘 써야겠다.”

회사 다닐 때 은행 점포에서 만난 다른 부서의 동료가 이랬습니다. “어쩌면 글씨를 그렇게도 못 쓰지?” 출금 전표에 적는 숫자와 이름자 정도를 본 그의 말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해 보였으면 그랬을까요. 언젠가부터 남들 앞에서 글씨 쓰는 일은 불편한 행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펜 잡기도 이상하게 하여 대충 휘갈기는 습성도 생겼습니다. 메모를 했다가 며칠 지나서 다시 볼 때 해독하기 어려워서 애를 먹은 일도 있을 정도입니다.

개선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능력이 출중한 한 임원의 글씨를 본 때였습니다. 나와 비교할 만한 수준의 솜씨였습니다. “훌륭한 분의 글씨가 이 정도라면 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임 대표에겐 짧게 부정적인 답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A4 용지에 글씨 쓰기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큰 글씨로 하루에 한 장 이내로 쓰기로 했습니다. 만년필로 천천히 쓰다보면 글씨가 나아질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합니다. 첫날 쓴 글씨 내용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얼마 전 『다시 꿈꾸기』(2020년 4월 28일)라는 글을 쓰면서 노력하면 재능은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깨우쳤다. 그 행동의 제1 우선순위가 글씨 쓰기는 아니지만 시도하기로 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의 글씨입니다. 그래도 천천히 쓰고 나니 알아보지 못할 글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나는 일이 더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적성검사를 한 결과입니다. 검사에서 개인이 지니는 재능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각각 평가받았습니다. 그 재능의 대부분은 비슷한 점수였는데 딱 두 가지가 다른 재능보다 유별나게 낮았습니다. 기억력과 수공(手工)이었습니다. 나이 든 뒤에 못 쓰는 글씨를 수공 능력 탓으로 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억지 합리화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글씨 쓰기라는 이 작은 시도는 의미를 갖습니다. 재능은 개발할 수 있다고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오류를 바로잡는 기회가 되는 셈입니다. 나이 들었으니 늦었다면, 늦은 만큼 기대 수준은 낮추면 될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니 한 가지 긍정의 기억도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마치고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알파벳을 정성들여 쓰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주변 어른들에게서 인쇄한 듯하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학생 시절 일기 형식으로 쓰던 공책들이 생각났습니다. 궁금해서 들춰 보았습니다. 가장 오래된 것이 중1 여름방학 때 것입니다. 글씨를 보니 웃음이 나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용 중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전에 만들어 두었던 그림연극 틀을 꺼내 놓은 이야기입니다. 그림연극은 하고 싶은데 그림 재주가 없어 아쉬워하면서 그림 그리기를 시도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날 일기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자꾸 그려보면 언젠가는 나도 그림연극 틀의 그림쯤은 능숙하게 그릴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아 그날이 기다려진다.” 누이동생과 동생 친구 한 명 해서 두 명의 관객 앞에서 그림연극 실연을 한 기억은 있지만, 지금도 그림 그리는 재주는 없으니 약간의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도 글씨 쓰기 시도의 첫날에 쓴 다른 한 부분을 보면서 희망을 이어가려 합니다.

“10년도 더 전에 사 둔 잉크병을 열어보니 말라 찌들어 있었다. 잉크는 새로 사기로 하고 만년필을 찾아보았다. 20년 전 선물로 받은 몽블랑을 언젠가 잃어버린 뒤 산 워터맨이 있었다. 만년필을 다시 샀다는 건 글씨 쓰기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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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홍승철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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