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하는 날[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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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하는 날

2020.10.15

객지에서 살다보면 고향 친구만큼 반가운 지인은 드뭅니다. 남자들은 여자들과 달라서 반가운 친구와 만나도 일정이 단순합니다. 일단 술집으로 장소를 옮겨서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회포를 풉니다. 여자들은 커피숍 같은 곳에서 만나 어느 정도 반가움을 해소한 후에야 식당으로 옮겨서 남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메뉴를 고르는 것도 남자들과 달라서 한참을 고민한 후에 결정을 합니다.

친구와 만나서 곧장 식당으로 갔습니다. 간단하게 안부를 주고받고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곧장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잠겨 들었습니다. 1960년대에만 해도 쌀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날이 몇 날 되지 않습니다. 추석 때와 모심기를 하는 날과 나락 타작하는 날 정도입니다.

요즘에는 벼를 거둘 때 콤바인이 벼를 베는 일부터 시작해서 마대자루에 벼를 담는 것까지 처리를 합니다. 추수를 하는 삯은 돈으로 지불하거나 벼로 분량이 정해져 있는 까닭에 논 주인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면 됩니다. 농촌 일을 하는데도 새참을 주지도 않습니다. 점심때가 되면 식당에서 배달해 온 식사로 때웁니다.

예전에는 벼를 추수하는 날은 며칠 전부터 준비를 시작합니다. 타작은 잘 익은 벼를 서너 단 분량 베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양지에서 바짝 말린 나락을 홀태로 훑거나, 나무 절구통을 옆으로 눕혀 놓고 볏단을 후려갈겨서 털어 냅니다. 벼에서 떨어져 나온 나락은 쭉정이와 티끌이며 지푸라기가 섞여 있습니다. 어머니가 키로 쭉정이며 티끌을 골라낸 나락을 디딜방아나 절구통에 찧으면 햅쌀이 됩니다.

어른들은 타작하는 날 쉽게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야 된다며 밤이 늦도록 방문 밖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걱정을 하십니다.

벼 타작은 마당이나 공터, 혹은 논에 쌓아 놓은 볏단의 이슬이 마를 무렵에 시작됩니다. 가까운 이웃들이나, 품을 주고 산 일꾼들 대여섯 명이 각각 역할을 맡습니다. 나이가 젊거나 힘이 좋은 장년 2명은 가장 힘이 드는 탈곡기를 맡습니다. 2명이 탈곡기를 밟는 이유는 볏단 옆에서 탈곡기를 밟는 쪽이 대충 털어 낸 벼를 옆 사람은 좀 더 세밀하게 털어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소년들이나 아낙네들이 볏단을 탈곡기 옆에 쌓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비교적 나이가 든 노인이나 아낙네들이 갈퀴로 탈곡기 앞에 수북하게 쌓이는 낱알을 끌어냅니다. 거칠게 돌아가는 탈곡기에 나락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푸라기까지 잘려 나가는 까닭에 바쁘게 갈퀴질을 해야 합니다.

햅쌀로 지은 쌀밥은 너무 희다 못해 푸릇한 기운이 감돕니다. 다른 반찬 필요 없이 간장만 있어도 입안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맛있는 햅쌀밥에 반찬도 풍부합니다. 돼지고기에 무를 넣고 끓여 기름기가 둥둥 떠 있는 돼지뭇국에, 고등어조림, 어린 배추로 묻혀 만든 얼갈이김치에, 양념간장으로 간을 한 깻잎김치는 최상급의 밥상입니다.

밥상 앞에는 타작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사촌 문화가 살아 있던 시절이라서 차려진 밥상에 수저 하나만 더 얹으면 된다는 생각에, 이웃이나, 동네 어른들도 초대합니다. 힘든 노동 뒤라서 고봉으로 푼 햇쌀밥이 게 눈 감추듯 사라집니다. 공짜로 밥을 드신 어른들은 밥값을 해야 한다며 두어 시간 일을 도와줍니다.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오후 새참 때까지 일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탈곡기 뒤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짚단들은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놀이터입니다. 변변한 장난감이나, 놀이터가 없어서 통나무를 잘라 만든 도롱태 바퀴를 밀고 다니거나, 깡통 차기를 하며 뛰어놀던 시절입니다. 짚단을 네모로 쌓아서 그 안에 들어가 놀거나, 서로에게 짚단을 던지기도 합니다. 멀리서 막 뛰어가 짚단 위로 슬라이딩을 하는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해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재미가 있습니다.

탈곡이 끝나면 풍구질이 시작됩니다. 키가 큰 사람이 삼태기로 나락을 퍼서 풍구 안에 붓습니다. 나락이 풍구 안을 통과하면서 가벼운 티끌이며 지푸라기는 멀리 날아갑니다. 바닥에 떨어진 나락을 가마니에 넣는 것으로 타작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노을이 질 무렵 수북하게 쌓여 있는 나락 쭉정이며 티끌이나 지푸라기 등을 빗자루로 쓸어서 한곳으로 모읍니다. 무덤처럼 수북하게 쌓인 티끌에 놓는 불을 왱기(왕겨)불이라 합니다. 왱깃불에 불을 놓으면 아이들이 모여듭니다. 불이 사그러들고 까만 재만 남을 즈음에 나락이 터지는 소리를 내며 하얀 티밥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작은 꼬장가리로 티밥을 긁어내서 주워 먹는 재미는 쏠쏠합니다.

라디오도 귀한 시절이라 밤을 밝히고 따뜻한 왱기불은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놀잇감입니다. 왱깃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하면서, 밤이 이슥해지도록 왱깃불 가에서 놉니다. 그 시간 부모님들은 올해 결산을 하고 계십니다.

농사 이외는 뚜렷한 벌이가 없어서 나락은 중요한 경제 수단입니다. 1월에 농협조합에서 받은 농자금, 구장 수곡, 빌린 쌀의 두 배로 갚아야 하는 장리쌀, 모내기 때 양곡상회에서 빌린 돈,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몇 가마니 남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내년 보리가 날 때까지 살아야 하는 걸 생각하면 종일 타작하느라 지친 몸인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습니다.

고향 친구와 만나면 늘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이 술안주가 됩니다. 그래도 우울하거나 슬프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추억 쌓기를 하고 헤어지는 날은 밤하늘의 별들이 더 정겨워 보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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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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