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가 알려준 것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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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가 알려준 것

2020.10.05

이번 추석연휴의 화제는 단연 나훈아였습니다. 추석날인 10월 1일 KBS 2TV가 방영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의 여운이 깁니다. 이미 일흔을 넘긴 나훈아는 2시간 반 동안 지치지 않는 열정과 활력으로 국내외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가수생활 54년 만에 처음으로 비대면 공연을 했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15년 만의 방송 출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의 발언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KBS는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말고 국민만 보고 가면서 거듭날 것이다.”,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이 나라를 지탱하고 지킨 건 오로지 국민이다”, “IMF 때도 세계가 깜짝 놀라지 않았나. 나라를 위해서 집에 있는 금붙이 다 꺼내 팔고.",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가 생길 수 없다.", "(방역 당국의) 말을 잘 듣는 우리 국민이 1등이다” 등. 이 중 위정자는 僞政者라는 뜻으로 한 말인지 좀 아리송하지만, 메시지 전달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발언이 방송을 탄 뒤 예상대로 정치권에서 또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야당은 "착한 국민, 지친 국민, 자꾸 눈물이 나는 국민들께 '대한민국의 주인은 여러분'이라며 잊고 있었던 국민의 자존심을 일깨웠다", “언론이나 권력자는 주인인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메시지”라며 나훈아의 발언을 문재인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여당은 그런 해석을 아전인수라고 비난하면서 “방역 당국의 호소를 조롱하고 8·15 광화문 집회와 10월 3일 개천절 집회를 지지하는 세력이 나훈아가 말한 '말 잘 듣고 잘 따르는' 국민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어떤 여당 인사는 “나훈아의 발언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고 이런 말 저런 말로 남 얘기하는 걸 보니 이분들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라며 “나훈아의 발언을 오독하지 말고 오도하지 마라. 한국어를 모르는가”라고 했습니다. 말은 그럴듯한데, 이 말은 여당 쪽에 더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발언과 그 이후의 논란보다 내가 더 주목한 것은 가수 나훈아의 자존감과 프로정신입니다. 그날의 공연과 이틀 후의 ‘나훈아 스페셜’(사실상 공연 재방송이었지만)을 통해 나훈아는 정부 훈장을 사양했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제 내려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돼 그 자리와 시간을 찾고 있다고 은퇴를 언급했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영혼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가수라는 직업의 무게도 무거운 판에 훈장을 받으면 그 값을 해야 하니 무게를 버틸 수 없고 노래를 못 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잠적’에 대해서는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꿈이 가슴에 고갈된 것 같아서 11년 동안 여러분 곁을 떠나 세계를 돌아다녔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나는 ‘흐를 유, 행할 행, 노래 가’. 즉 유행가를 부르는 가수다. 남는 게 노래라는 뜻이다.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면 그뿐이다. 뭔가로 남는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것 같다. 그런 것 묻지 말라.”고 공연을 마친 소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1966년에 데뷔한 그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54년째 가수로 살아왔는데 연습만이 살 길이고 연습만이 특별한 것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만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콘서트 개최를 결심해 개런티 없이 공연을 하기로 하고, 6월부터 석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왔다고 합니다. 나훈아의 공연 기획 노트는 갖가지 아이디어와 메모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공연 이후 새로운 사실 몇 가지가 알려지면서 나훈아는 더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2018년 7월 북측이 원한 평양공연 명단에 포함됐지만 참여하지 않았다. 북한에서의 공연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1990년에 이건희 삼성 회장이 신라호텔에서 고위 임원 파티를 개최하면서 공연을 해달라고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나는 대중가수다. 대중 앞에서만 노래를 부른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 티켓을 끊어 들어오면 된다”고 말했다.
-정치 입문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가수가 천직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라며 거부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 입장권이 10만 원을 넘지 않게 했다. 무대가 잘 안 보이는 좌석은 아예 팔지 않았다. 석 달 전부터 세종문화회관을 드나들며 공연 구상을 했다.

열거한 미담은 다 사실이겠지요? 부분적으로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나훈아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 철저한 전문가가 될 것, 그 일을 어디까지나 품위와 품격을 지키면서 할 것,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기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거짓말을 일삼고, 천박한 말싸움이나 하고, 스스로 공정을 무너뜨리면서 공정을 강조하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인간들이 득세하는 세상이어서 그런 메시지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나훈아가 왜 1969년에 발표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안 불렀을까 하는 점입니다. 레코드 발매 당시 10만 장이 팔린 엄청난 히트곡이었고, 노래를 빌미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 대표곡인데 말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훈아가 여느 가수들과 달리 노래를 부르기만 하는 가수가 아니라 만들어 내는 가수라는 점입니다. 시대감각과 국민 정서에 맞는 가사와 곡조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달래주는 예인(藝人)이지요. 이번에도 ‘테스형’과 같은 화제의 신곡을 몇 곡 발표했던데, 앞으로도 감성과 체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좋은 노래를 많이 만들고 불러주어 우리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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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등 수상. 저서 ‘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손들지 않는 기자들’,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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