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역사소환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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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역사소환

2020.09.28

KBS의 연중 대하드라마 ‘개국’이 한창 뜨던 1983년 봄 전혀 예기치 않은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보낸 사람은 왕상은(1920~2019) 개성 왕씨(開城王氏) 종친회장. 왕 회장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부산에서 해운회사를 설립한 기업가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라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을 나온 그의 편지는 격식과 예의를 갖춘 문투였습니다. 반면 내용은 흑역사(黑歷史)에 대한 강한 저항이었습니다.

편지 내용은 “드라마의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 이성계의 쿠데타 당위성과 논리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넘치니 개성 왕씨를 너무 폄훼하지 말도록 제작진에 일러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당시 필자는 방송 담당 기자로 ‘주간 방송평’을 써온 터라 그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편지 내용을 담당 PD(고 장형일)에게 알려주면서 참고하라는 말을 했지만 구체적으로 드라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드라마 ‘개국’은 첫 방영 이후 시청률이 높았지만, ‘신군부의 집권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어용 사극’ '흑역사‘라는 비판을 지금까지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극본을 쓴 작가(이은성)는 원작을 무시하고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개조하는 바람에 원작자(이태원)는 물론 방송사 고위 간부들로부터도 거센 항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잘난 조상 끌어대면 닭 새끼가 봉황 될까

문재인 정부 들어 ‘역사소환(召喚)’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등장하면서 소환 대상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최근 안중근 의사가 불려나왔습니다.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의 군복무 시절 전화로 병가를 연장한 사실을 두고 박성준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추 장관 아들이 군에 간 것은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란 논평을 한 것이 발단입니다. 안 의사의 본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 종친들이 발끈했습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 안 의사를 파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어디 있느냐”고. 지난 21일에는 안씨 문중 관련 인사 20여 명이 국회를 방문, 박 대변인의 사퇴를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민주당에 전달했습니다.
‘조국 흑서’를 낸 서민 교수(단국대)는 “추 장관 아들이 안중근 의사라면 윤미향은 유관순 열사, 정청래는 계백 장군, 황운하는 을지문덕 장군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도 “도를 넘어선 망발”이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민주당 황희석 최고위원은 온갖 의혹으로 온 가족이 혐의를 받고 있는 조국 전 법무장관을 두고, 지난 6월 “조국 교수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세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직계 후손”이라고 했다가 조씨 문중의 반발을 샀습니다. “창녕 조씨(昌寧曺氏)라고 다 같은 조씨냐. 전혀 사실이 아니다”는 강변입니다. 민변 출신인 황 위원은 지난해 9월부터 법무부 검찰개혁 추진지원단 단장 직을 맡고 있습니다.

법무부 인권국장이던 올 3월 황 위원은 “조국 하면 기묘사화의 피해자가 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떠오르고, 대윤·소윤 하면 권력을 남용하던 윤임·윤원형이 떠오른다”고 했다가 한양 조씨(漢陽趙氏) 문중의 분노를 샀습니다. “한양 조씨 문중과 국민을 모독하는 망언”이라고.
황 위원은 조(曺)국을 조(趙)광조 선생에, 윤석열 검찰총장을 윤임·윤원형에 빗댄 것입니다. 번지수가 틀린 억지 비유입니다.

# 정치적 역사공정, 축소지향 못 벗어나

역사소환은 문 대통령이 집권 초기인 2017년 6월 1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가야사(伽倻史)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하라”고 뜬금없이 지시하면서부터 스타트업 했습니다.
이후 ‘친일 청산’을 빌미로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 논쟁, 박정희와 새마을운동, 이명박과 4대강 보, 백선엽과 친일 행적 비판에다, 동학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끝없는 역사소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헌법 전문의 ‘자유’ 삭제, 5·18 비판 형사처벌,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한미동맹 파기와 전시작전권 환수, 한일협정 및 위안부 합의 부정 등 정치적 역사공정(工程)의 주춧돌을 놓고 있습니다.
5,000년 전 황제시대를 중국 역사의 시원으로 만든 역사공정과 주변 국가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고조선, 고구려, 발해), 서남공정(티베트)처럼 중국이 확대지향의 공정이라면, 우리는 축소지향의 공정이라는 인식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영어의 god(신)을 거꾸로 쓰면 dog(개)가 되듯이, 말을 쉽게 뒤집다 ‘신의 죽음’이 ‘개의 죽음’이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흑역사(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은 과거의 일)를 백역사(더 평가되고 알려져야 하는 과거의 일)로 치환하다 보면 호랑이 아비에 개자식(虎父犬子 호부견자)이 태어날 수도 있듯이….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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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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