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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과 정치적 선택

2020.09.23

요즘 각종 국제 비교에 대한 보도가 많습니다. 선진국들에 비해 경제사회적 발전이 좀 늦게 시작된 우리나라의 위치와 위상에 대한 궁금증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경제, 군사 대국일 뿐 아니라 노벨상 수상, 대중예술 등 소프트파워 분야에서도 1등인 나라로 국제비교에서 늘 선두권입니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2020 사회진보지수(Social Progress Index, SPI) 국제 비교에서 한국이 17위인 반면 미국은 28위를 차지했습니다.

■ 1인당 국민소득과 사회개발지수(SPI)

국제비교에서 흔히 쓰이는 1인당 국민소득(GDP per capita)은 일정 기간 내 경제활동의 결과를 보여주지만 삶의 질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국제기구가 생활수준이나 사회 발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지표에 바탕을 둔 지수를 개발했습니다. SPI도 이런 성격의 지수로 사회진보조사기구라는 국제적 비영리단체가 개발하여 2011년부터 매년 130개가 넘는 나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소득과 삶의 질 지표는 1대 1로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1인당 소득 수준이 한국의 반 이하인 나라들의 경우 대체로 소득이 높으면 SPI도 높습니다. 하지만 소득이 높아질수록 이런 동행성은 약해집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소득이 뉴질랜드보다 높지만 SPI 순위는 반대입니다. 2020년 순위를 보면 뉴질랜드는 4위, 싱가포르는 29위입니다.

SPI는 ‘인간의 기본니즈(needs)’, ‘웰빙의 기반’, 그리고 ‘기회’라는 세 가지 큰 분야 각각에 4개의 항목, 또 각 항목마다 4~5개 지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차적으로 늘어나는 세부항목 구성이 피라미드 그림을 닮았습니다. 분야별, 또는 총점을 이용하여 국가 간의 비교, 그리고 특정 국가의 성과가 해가 바뀌며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알 수 있지요.

■ 한국과 미국의 2020 SPI

한국은 2011년 이후 20위권에서 등락하다 지난 3년 사이 3~4단계 순위가 높아졌습니다. ‘웰빙의 기반’ 분야의 개선이 기여한 바 큽니다. 인터넷과 휴대폰 사용의 확산, 그리고 감염병으로 인한 조기 사망의 감소 등이 점수를 끌어 올렸습니다. ‘양질의 의료서비스 접근’, '개인의 안전'과 같은 분야에서 한국은 미국보다도 훨씬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반면 양성평등, 성소수자 포용 등의 분야 점수가 낮습니다.

미국은 2011년 19위로 출발했으나 순위가 낮아져 작년에 22위, 올해 28위로 밀려났습니다. ‘기본니즈’와 ‘기회’ 분야의 점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져 전체 순위가 낮아진 것인데 ‘기본니즈’ 분야의 하락을 주도한 것은 ‘개인의 안전’ 항목입니다. '교통사고 사망', '범죄율이 높다는 인식', '살인범죄' 등 부정적 영역의 결과가 나쁘고 시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9월 초 글에서 2020년도 SPI 발표를 통해 본 미국의 현실에 대해 개탄합니다. “미국은 대학 평가에서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양질의 기초 교육에 대한 접근도는 91위이다. ... 의료 기술면에서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지만, 양질의 의료 서비스 접근성은 97번째이다.” 올해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드러난 미국의 난맥상은 이번 자료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년 조사에서 미국의 위상이 더 나빠질 개연성이 큽니다.

■ OECD의 삶의 질 지수(BLI)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30여 개의 회원국을 대상으로 경제적 변수도 포함하는 삶의 질 지수(Better Life Index, BLI)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삶의 조건’, ‘삶의 질’의 두 영역의 세부 사항에 대해 조사하여 매년 발표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조건에는 주거비, 소득과 부, 직업과 소득이, 그리고 삶의 질에는 사회적 관계, 환경, 건강, 일과 삶의 조화 등이 하위 항목입니다.

BLI로 본 한국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OECD 평균에 비해 부채를 감안한 소득은 낮고, 빈부격차는 좀 높은 편이나 주거비 부담은 작은 편입니다. 3개월 동안 소득이 없으면 빈곤층으로 떨어질 처지의 인구 비중은 OECD 평균이나 미국에 비해 더 작습니다. 하지만 평소 각종 모임이 빈번한 것을 보며 받는 인상과는 달리,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친구나 가족이 없다는 사람 비중이 상당히 높고, 삶의 만족도가 낮은 편입니다. 자살률이 높은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안하고 불만스런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 미국인들은 왜 트럼프를 뽑았나?

SPI나 BLI는 미국 서민들의 처지가 어려운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근래 미국 유권자들의 선택은 쉽게 납득이 안 됩니다. SPI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의료보험이 없는 미국에서 민간 의료보험이 비싸서 의료서비스 접근성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난번 선거에서 서민들의 의료서비스 접근을 용이하게 해주는 오바마케어 정책의 민주당보다 부자와 기업의 세금을 낮추는 것을 우선시하는 공화당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다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에 따르면 납득이 쉽지 않은 이런 선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많은 유권자들이 그간 지도층·지식인들이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굴욕감을 느껴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이를 잘 이용한 선동적인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내륙 중서부나 남부에 살며 전통 제조업,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대졸 이하 학력 백인들에게 동해안 뉴욕 월가의 금융업, 서해안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의 정보통신업의 호황은 남의 나라 일인 거지요. 동·서해안 대도시 중심의 호황과 다문화 추세가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비껴가며 이 지역 주민들의 이질감과 소외감과 걱정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 등장한 트럼프는 ‘그동안 사회 지도층과 언론이 당신들을 무시했고, 불법 이민자들을 위하느라 당신들의 처지가 나빠졌다. 내가 이런 적폐를 확 뒤집어 여러분의 미국이 다시 위대하게 할 것이다’라는 일종의 反엘리트 마케팅에 성공해서 대선에서 신승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등 그간 드러난 무능과 거짓 언행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존 트럼프 지지자들의 선택이 바뀌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민주당의 바이든 후보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존경하며 걱정하는 바를 알고 있다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합니다.

■ 한국은?

통계를 정리하고 관련 글을 보며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이어진 사회지도층의 행태가 서민 계층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한 것이 과거 보수적 정권이 퇴장하게 된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객관적 삶의 질 지표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기에 ‘못 살겠다’가 정권교체의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지도층이 지연·혈연·학연, 사적 이익에 얽혀 공적 결정을 내리고 적법한 데 뭐가 문제냐는 행태가 거듭되면 구린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들어선 현 집권 세력이 국정 운영을 잘하거나, 과거 세력들에 비해 더 도덕적이거나 공정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지난 두 번의 큰 선거를 크게 이기는 것을 보며 한국에서도 무시당했다는 정서의 유권자들이 많고 이들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잘 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용된 기사)
‘We’re No. 28! And Dropping!‘, Nicholas Kristof, New York Times 2020. 9. 9.
Who Can Win America’s Politics of Humiliation?, Thomas Friedman, New York Times 2020. 9. 8.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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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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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gi, conpaper E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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