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걷는 즐거움 [노경아]




www.freecolumn.co.kr

한밤중에 걷는 즐거움

2020.08.27

오늘도 내 손목에선 ‘축하’의 진동이 울렸습니다. 스마트폰 건강 앱에 설정한 ‘만 보’를 걸었다는 신호입니다. 이 재미가 쏠쏠해 퇴근 후 집(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을 기점으로 이웃 동네까지 걷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함께 걸어주는 큰아이가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걷는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요일별로 코스도 정했습니다. 월요일엔 홍릉을 지나 청량리로, 화요일엔 중랑천을 따라 면목동으로, 수요일엔 이화교를 넘어 상봉동으로, 목요일엔 중랑천~묵동천~화랑천을 거쳐 태릉으로, 금요일엔 배봉산 둘레길로, 토·일요일엔 마음 가는 대로.

태릉 코스가 가장 걷기 좋습니다. 자동차가 없는 개천을 따라 걸으며 야경을 감상할 수 있고, 돌아올 땐 옛 경춘선 폐철길을 걸으며 낭만을 즐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태릉 동네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술 마시기 좋은 목요일 밤에도 돼지갈비 굽는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드넓은 배밭이 사라진 지는 오래입니다.

큰아이는 어릴 적 태릉에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합니다. ‘집 앞에 돼지갈빗집이 널려 있고, 갈비를 먹지 않는 날에도 맛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답니다. 갈비를 먹은 후 아빠와 갈빗집 마당에 눈처럼 핀 배꽃을 보던 기억도 난다네요.

2000년대 초만 해도 태릉과 공릉, 먹골의 갈빗집들은 특별했습니다. 넓은 배밭에 듬성듬성 놓인 평상에 앉아 숯불에 구운 돼지갈비를 뜯었습니다. 배꽃이 활짝 피는 봄이면 숯불향과 꽃향에 취해 술잔깨나 돌렸지요. 갈비를 서넛 판째 먹을 때면 주인이 와서 “우리집 갈비는 양념에 저 밭의 배들을 듬뿍 갈아 넣어 윤기가 흐르고 깊은 맛이 난답니다”라고 자랑하곤 했답니다.

‘태릉갈비’의 시작은 묘동마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묘동은 현재 태릉선수촌 자리의 옛 지명입니다. 이곳은 무덤이 많고 태·강릉의 제사를 맡았던 정자각(丁字閣)이 있어 묘산(廟山)이라 불리다 묘동으로 지명이 바뀌었다네요. 왕의 장례나 제삿날, 왕릉 근처에 살던 이들이 허드렛일을 하며 귀한 고기맛을 본 후에 알음알음 궁중요리법이 민간으로 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홍릉갈비’ ‘삼릉갈비’가 유명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동네에선 갈빗집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드넓은 배밭도, 단맛이 강하고 물이 많아 ‘꿀배’로 불렸던 먹골배의 달콤한 추억도 갈비가 익어가던 연기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태릉선수촌과 태릉골프장만이 그대로입니다. 정부가 이 동네도 택지로 개발한다니, 머잖아 저 푸른 땅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겠지요. 그린벨트 지역인데 어떻게 진행할지 참 궁금합니다.

그나저나 태릉이 이슈가 되면서 발음이 [태릉]인지, [태능]인지를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릉(陵)이 상황에 따라 [능]으로, [릉]으로도 읽히니 그럴 만도 합니다. 우리말의 ‘자음동화’ 때문인데, 한마디로 앞뒤 자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발음하기 쉽게 바뀌는 현상입니다. “받침 ‘ㅁ, ㅇ’ 뒤에 연결되는 ‘ㄹ’은 [ㄴ]으로 발음한다”(표준발음법 제19항)와 “‘ㄴ’은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발음한다”(제20항)라는 규칙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공릉은 19항에 의거해 [공능]으로 발음해야 합니다. 또 정릉은 [정능], 강릉은 [강능]이라고 소리 내야 맞습니다. 조선의 아홉 번째 임금 성종이 잠들어 있는 선능은 20항에 따라 [설릉]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태릉은 음운 변화가 일어날 환경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민할 것도 없이 표기대로 [태릉]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내일은 사도세자의 초기 묘소인 영우원 터와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 터가 있는 배봉산을 걷는 날입니다. 걷다 보면 몸은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니체가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말한 뜻도 알 것 같습니다. 당신도 길 위의 명상가가 되길 권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