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怨恨) 살 일 아니네…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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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怨恨) 살 일 아니네…

2020.08.25

중국 산서(山西)성 고평(高平)시에는 2,0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요리가 있습니다. 백기육(白起肉 바이치러우)입니다. 기원전 260년 진(秦)나라 맹장 백기(白起)가 조(趙)나라 땅 장평(長平; 지금의 고평 지역)전투에서 조나라 군을 대파하고 포로 45만 명을 생매장했습니다. 이런 참상을 당한 장평 사람들이 백기의 고기라도 씹으며 원한과 분노를 풀기 위해 만들어 먹던 요리라고 합니다. 물론 인육은 아니고 두부를 끓여 만든 요리이지만, 현지 사람들은 ‘백기를 삶아 먹는다’(吃白起 츠바이치)고 합니다.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지는 한이 맺힌 음식입니다.

까마득한 옛날의 장평전투 고사가 항간의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지난 7일 검찰 인사 때 광주지검장에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밀려난 문찬석 검사는 당일 사표를 던지며 장평전투를 언급했습니다. 문 지검장은 “조나라가 인재가 없어 참패를 당했느냐. 옹졸하고 암울한 군주가 무능한 장수를 등용한 그릇된 용인술 때문이었다”고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충성 포상’이라는 추미애 인사와 장관의 위법한 지휘권 발동은 ‘사법 참사’ 라고 공박했습니다.

조나라의 장평전투 참패 원인은 노장 염파(廉頗)의 수성전(守城戰)을 못마땅하게 여긴 왕이 진의 이간책에 말려 지휘관을 젊은 조괄(趙括)로 바꾼 데 있었습니다. 진과의 전쟁에서 전공이 혁혁했던 조사(趙奢)의 아들 조괄은 ‘병법의 달인’이라고 자처했으나 백기의 복병전술에 속아 45만 대군을 모두 잃고 자신도 전사했습니다. 효성왕은 조괄의 부모와 염파의 문경지우(刎頸之友)인 재상 인상여(闉相如)의 간곡한 반대를 뿌리치고 실전 경험이 없는 조괄의 임용을 강행했다가 지리멸렬의 낭패를 당했습니다.(자유칼럼 2008년 5월 28일 <현자는 어디에> 참조)

# 나라의 흥망을 갈라놓은 사람 쓰기

이 전투의 참패로 조나라는 농사짓고 전쟁할 장정이 없어 30년 뒤에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반면 이 전투의 승리로 백기는 무안후(武安侯) 작위를 얻었습니다. 30여 년 전장에서 백전백승의 전공을 세워 진의 천하통일 기초를 세운 공로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가 죽인 적군이 16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기의 말로도 처참했습니다. 그의 출세를 시샘한 재상 범수(范睢)의 모함으로 왕의 명령을 받고 자결했습니다. "조나라 군사 수십만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유언과, 장평 땅 원귀의 후손들에게 살점을 씹히는 원한을 남긴 채.

우리나라에도 한이 담긴 음식이 있었습니다. 성계탕(成桂湯)입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이후 고려 유신(遺臣)들이 최영 장군의 제사상에 돼지고기(성계육)를 올렸다가 그것을 잘게 썰어 끓인 국을 성계탕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기해년 돼지띠인 터라 성계육으로 탕을 끓여 먹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습니다. 고려조의 왕족·벼슬아치와 토호 등 기득권 세력이 거의 몰살당하고 그 일가와 측근들까지 숙청당한 백성들의 한이 담긴 음식입니다.

‘조랭이떡국’이라는 말도 같은 데서 연유한 음식입니다. 개경(開京: 개성) 백성들은 떡국을 만들 때 떡 가래를 칼로 가지런히 썰지 않고, 손으로 수제비 뜨듯 뭉뚝뭉뚝 떼어 넣고 국을 끓여 먹었다고 합니다. 이성계의 목을 비틀 듯 떡을 비틀어 넣으며 미움을 표출한 것이지요. 이 같은 음식의 등장은 조선 초 혁명세력의 청산 대상인 고려왕조의 왕(王) 씨 일족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나라가 망하면 백성은 어육(魚肉) 되고

태조 이성계는 건국 초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 씨 중 남은 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모두 목을 베었습니다.(태조실록 5권) 이때 왕 씨인 줄 알고 숨겨 주거나, 왕 씨와 혼인한 인척도 사형에 처했습니다. 집안 멸문을 피해 달아나 숨은 왕 씨들 중에는 성을 옥(玉) 전(全·田) 김(金)으로 바꿔 궤멸을 면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지배계급이 바뀐 역성혁명 중에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참극이었습니다. 오늘날 전주 이씨 인구는 260만 명, 개성 왕씨는 1만9,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왕조의 교체든, (프랑스혁명 같은) 시민혁명이든 권력 주체가 바뀌는 변란 변혁기에는 으레 기득권 세력이나 애매한 백성들까지 참혹하게 죽거나 핍박을 받았습니다. 전투에 패해 도륙당한 군인, 적폐·청산 대상에 올라 사형·파직·유배된 지도층은 물론, 도시 파괴·재산 약탈·아녀자 겁간 등으로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고 맙니다. 그로 인한 원한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것을 보면 몸서리가 쳐지도록 끔찍한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은 돌에 새기고, 원한은 모래 위에 써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 현재는 항상 우울한 것……(러시아 시인 푸시킨)
숱한 선각자들이 인간의 선성(善性) 회복을 되뇌었지만, 원한은 북극 얼음덩어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얼음이 녹으면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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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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