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의 꿈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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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의 꿈

2020.08.21

     
요즈음에는 텔레비전 프로가 양분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조리하거나 먹는 프로가 아니면 오디션프로입니다. 방송사마다 먹방과 오디션 프로를 경쟁적으로 내보내다 보니 방송사간의 차별성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과거 10여 년 전에는 방송사들마다 ‘막장드라마’를 경쟁적으로 내보냈습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막장드라마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어떤 ‘음모’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그 시대를 반영합니다. 막장 드라마를 유행시켜서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국민들을 무관심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전 국민이 시청하는 방송에서 고급 음식이나, 과도한 양의 음식 먹는 장면을 앞을 다투어 내보내는 것이나, 일등만 요구하는 오디션 프로를 경쟁적으로 내보내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밥 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가정이 많을 뿐만 아니라, 1등이 아니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다는 식의 방송프로가 과연 공익성이 있는지 띠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는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모든 물자들이 부족했습니다. 집에 신기한 물건이 들어오면 부모님 몰래 학교로 들고 가서 자랑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서울 사는 삼촌이 쓰고 온 선글라스를 갖고 와서 자랑을 하는가 하면, 그 시절에는 보기 힘들었던 일제 일회용 라이터를 들고 와서 쉬는 시간 내내 불을 켜 보이기도 하고, 일반 껌보다 비싼 가격에 팔리던 풍선껌을 씹으며 연신 볼이 터지도록 풍선껌을 불기도 합니다. 그 친구는 풍선껌이란 별명이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따라다녔습니다.

이름이 두기인 친구는 부모님이 건어물전을 합니다. 가끔 가게에서 부모님들 몰래 오징어를 들고 와서 조금씩 찢어서 나누어주고는 했습니다. 그 친구의 별명은 일본어로 마른 오징어를 뜻하는 스루메(するめ)를 우리식으로 변형한 ‘쓰리메’였습니다. 건어물전 이웃의 약방집 아들도 경쟁 삼아 부모님 모르게 영양제인 ‘원기소’를 한 움큼씩 들고 와서 두세 알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친구 별명은 어른들 사이에서는 약방집 아들이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원기소’였습니다.

이 밖에도 앞이마가 튀어나왔다고 해서 ‘앞짱구’ 잘 웃는다고 해서 ‘합죽이’, 머리에 기생충이 잘 난다고 해서 ‘기생충’, 안경을 썼다고 해서 ‘안경’ 등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뛰어다니며 장난 잘 치는 친구들은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습니다. 그도 저도 특징이 없으면 아버지 이름을 놀림 삼아 부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만화책을 거의 끼고 사는 데다, 이름에 ‘만’자가 들어가서 ‘만화가’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학교 근처에 사시는 담임 선생님이 토요일 오후에 이사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5학년이면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 시절에는 담임 선생님이 자기 반 학생들을 불러서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거나, 텃밭의 고추를 따라고 시키는 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못해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소재지 사는 몇 명이 담임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이삿짐을 날라주기로 했습니다. 학생 중에는 소재지에 살지 않는 ‘티밥쟁이’도 끼어 있었습니다. 나이가 두 살 정도 많고 덩치가 가장 큰 ‘티밥쟁이’는 아버지가 장날 뻥튀기를 튀겨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컸는데 수줍음을 많이 탔습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다 보니 특별히 친한 친구도 없이 늘 혼자 지내는 편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이사를 가실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셋집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본가였습니다. 이삿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해서 리어카로 이삿짐을 나르기로 했습니다. 덩치가 큰 티밥쟁이가 앞에서 끌고, 우리는 뒤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5리 길을 왕복으로 서너 차례 했습니다.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한참 먹을 나이 때인지라 모두 배가 고팠습니다. 맹물에 국수를 말아서 간장고명을 얹은 시원한 국수 한 그릇씩 말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달랑 인절미 한 접시가 나왔습니다. 한참 힘을 쓰고 난 뒤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인절미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티밥쟁이는 입맛만 다실 뿐 먹지를 않았습니다.

  “환문이는 왜 안 먹는 거여? 집에까지 가려면 배가 고플 텐데?”

보다 못한 담임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셨지만 티밥쟁이는 얼굴을 붉힐 뿐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인절미 접시에 인절미가 달랑 한 개만 남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이번에도 ‘하나 남은 것은 환문이 먹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티밥쟁이가 침을 삼키며 인절미를 바라봤습니다. 막 먹으려는 찰나에 쓰리메가 "먹기 싫으면 내가 먹지" 라며 잽싸게 낚아채서 입안에 넣었습니다. 그때의 티밥쟁이 표정은 분노와 허망함, 억울함과, 야속함이 복잡 미묘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웃고 떠들며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티밥쟁이는 왜 인절미를 먹지 않았느냐? 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티밥쟁이는 쓰리메를 원망서린 눈초리로 가끔 노려보기는 했지만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쓰리메며, 원기소며, 합죽이도 제 자리를 꿰차고 들어가서 객지 사람들이 되어 갈 무렵입니다. 우연히 티밥쟁이와, 그의 동생을 삼거리 길목에서 만났습니다. 머리카락에 기름을 바르고 서울 사람 티를 내고 있는 티밥쟁이보다 동생의 옷차림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 시절 모 은행의 명동지점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가끔 남태평양이나, 오라오라 같은 나이트클럽에 다녔는데 거기에 출연하는 가수들처럼 차려입었습니다.

  “동생 매니저하잖여.”

제가 안부를 묻는 말에 티밥쟁이는 동생은 가수이고 자신은 메니저를 하고 있다며 부끄럽게 웃었습니다. 매니저라는 말에 갑자기 인절미 접시가 생각나서 놀랐습니다. 가수 매니저와 인절미 한 개도 먹지 못한 티밥쟁이의 얼굴이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는 탓에 동창들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동창으로부터 티밥쟁이의 근황을 들었습니다. 티밥쟁이 동생이 읍내의 무슨 노래자랑에서 1등을 했다는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울의 유명한 작곡가가 직접 찾아왔고 티밥쟁이 동생이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했다는 겁니다. 몇 개월 후 동생은 레코드 취입을 해야 가수로 성공할 수 있다며, 아버지가 평생을 뻥튀기 기계를 돌려 장만한 몇 마지기의 땅을 팔아 가수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티밥쟁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에 일부러 뻥튀기를 하는 곳으로 갈 때도 있습니다. 뻥튀기를 하시는 분들은 종일 뻥튀기 기계를 돌리다보니 얼굴은 항상 연기 그을음에 시커멓습니다.
머리카락이며 눈썹에는 뻥튀기 부스러기가 눈송이처럼 앉아 있습니다. 시커먼 땀으로 검게 절어 있는 수건을 목에 건 얼굴로 우리들을 보면 환하게 웃으며 반깁니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한 주먹씩 내 주는 뻥튀기를 양손으로 받아서 먹으며 집에 가는 길은 정말 즐거웠었습니다.

비록 산골 논이지만 평생 뻥튀기 기계를 돌려 몇 백원씩 받은 돈을 모아서 산 논을 기꺼이 팔 때는 부자지간에 교감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아들은 “가수가 돼서 성공하면 더 이상 뻥튀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을 테고, 아버지는 아들이 노래자랑에서 1등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힘이 나는 판국에,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가 되겠다는 말을 하니까 앞뒤 가늠해 볼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신세 조졌지 머. 아무나 가수하나.”

문방구 친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대복을 입은 동생의 모습에서 풍기는 잘나가는 가수의 이미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활수준이 좋아지고 농협에 하나로 마트가 생기면서 길가에 있는 가게 삼분의 이는 문을 닫았습니다. 장날에는 티밥쟁이들이 세 명씩이나 있는데 한 명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터 장사꾼들도 눈에 뛰도록 줄어 바람만 허허롭게 돌아다녔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티밥쟁이 동생을 만났습니다. 대전 무슨 유원지 입구에서 꽤 큰 식당을 하고 있다며 꼭 놀러 오라는 말에 형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형은 서울에서 개인 화물차를 모는데 먹고살 만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제 입안에서는 가수는 언제 그만두었느냐는 말이 맴돌았지만 결국 목구멍 안으로 그냥 삼키고 말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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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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