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기대로 움직인 국민에게 완패한 정부


합리적 기대로 움직인 국민에게 완패한 정부

김현숙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정부 부동산 정책 관찰한 국민, 유사한 수요 규제 정책 반복될 것 알고 대응


문재인 정부는 짧은 기간 여러 차례 부동산 규제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매번 정책에 대한 시장 반응을 보고 이에 따라 원래 정책 의도와 차이가 나면 조금씩 수정하여 다시금 정책을 내는 일종의 적응적 기대(adaptive expectation)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적응적 기대 가설은 과거 정보에 따른 예측이 실패해도 그에 기초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가장 최근의 8·4 부동산 공급 대책도 근본적 인식 전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나온 정책에 대한 시장의 부정적 반응이 커지자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만든 것이다.


부동산 정책을 관찰한 국민은 정부가 강도(强度)는 높지만 유사한 수요 규제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합리적 기대(rational expectation)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정부 규제 정책이 작동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루커스(Robert Lucas)는 이성적 경제 주체들이 과거 정보만이 아니라 현재의 모든 정보와 미래에 대한 합리적 기대에 따라 행동하여 경제정책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는 합리적 기대 가설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바 있다.




정부의 의사 결정 정보에는 주택 보급률에 대한 착시가 큰 오류로 포함되어 있었다. 2018년 전국 주택 보급률 104.2%, 서울 주택 보급률 95.9%라는 숫자에 기초하여 주택 수는 부족하지 않다고 믿고 새 주택 공급을 지금껏 제한하였다. 서울시의 2018년 주택 현황을 살펴보면 주거 환경이 열악해질 수 있다고 판단되는 30년 이상 된 아파트 비율은 18.7%이고, 20년 이상 된 아파트는 47.1%이다. 복합적 주거 환경이 좋다고 알려진 지역의 노후 아파트 비율은 이보다도 훨씬 높다. 주택은 지역 재화이고, 품질이 서로 다르다. 양질 주택을 인프라가 잘 갖춰진 지역에 꾸준히 공급하지 않으면 살고 싶은 집은 부족하게 된다. 8·4 공급 대책에 포함된 공공 참여형 고밀 재건축, 용적률 상향, 공원 설치 의무 완화 등은 살고 싶은 집과는 거리가 멀다.


좀 단순화하여, 부동산 시장에 정부와 무주택자라는 두 참여자가 있다고 하자. 정부가 부동산과 관련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재건축 허가를 포함한 새로운 공급은 없이, 갭투자를 막고 다주택자 매물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대출 규제, 주택 거래 및 보유 관련 세금을 급격히 올리는 수요 억제 정책, 다른 하나는 새 주택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이다. 정부가 재건축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내면 좋은 주거 환경에서 살고 싶은 무주택자는 은행 금리도 낮고 공급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요 대기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주택을 구매할 것인가 하는 두 전략 중 구매를 선택한다. 만약 정부가 꾸준한 새 주택 공급을 전략으로 제시한다면, 무주택자들은 앞으로 주택 공급량이 늘어난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전·월세로 살면서 집 살 시기를 적절히 잡는 전략을 선택한다.




합리적 정부라면 정부 정책에 따른 무주택 실수요자의 전략을 정책 발표 전에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새 주택 공급 시그널을 보냄으로써 무주택자들의 자가 구매 시기를 자신의 경제적 조건에 따라 선택하도록 기회를 줄 수 있다. 이를 통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한 공급 시기까지 수요를 분산해 장기적으로 시장 가격을 안정시키는 균형이 이뤄진다.


그런데 정부는 무주택자들의 전략 선택을 예측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책이 빗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수요 억제 전략을 여러 번 고수하였다. 역설적으로 집값 15억원 기준의 대출 규제는 수도권 곳곳의 집값을 크게 올렸고, 무주택자의 가수요를 폭발시켰다. 부동산 3법과 임대차 3법을 밀어붙여 정부의 잘못된 정책 결과로 올라간 집값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하고 있다.


지자체와 조율도 안 된 상태에서 내놓은 이번 공급 대책만으로는 처음부터 장기적인 공급 대책을 제시한 경우와 비교할 때, 무주택자가 앞서 말한 매수 대기 전략을 선택하도록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주택 정책의 목표는 더 많은 국민이 살고 싶은 곳에 자기 집을 보유하도록 도와주고, 무주택 서민을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복잡한 경제 상황에 따른 수요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장기적 공급 방안을 한발 먼저 설계하는 것이 합리적 정부가 할 일이다. 정부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아주 늦게 쥐어짜기식 공급 대책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보려는 현 정부는 국민과 벌인 게임에서 완패한 셈이다.

조선일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8/2020080800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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