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에 남아 있는 두 전화번호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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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에 남아 있는 두 전화번호

2020.08.07

반세기도 전에 돌아가신 제 선친의 평생소원의 하나는 통일이 되면 개성의 조상들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형제 중 셋째인 아버님은 일제 강점 때 유일하게 개성 근교 ‘황산’이라는 곳에 있는 이 산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종가 장손을 안내해 다시 이곳을 찾아 성묘를 하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1950년 한국동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개성이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어 광복 후 수년은 자유로이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 당시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제 본관 평해(平海) 황씨는 경상북도 평해군에 시조(始祖) 삼 형제의 묘와 사당이 있어 매년 가을에 전국 평해 황씨 대표들이 모여 시제를 모십니다. 제 가족이 속하는 파(派) 집성촌은 개성에 있어 제 조부님 대까지는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족보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개성 방문을 유언처럼 남기고 선친은 돌아가셨지만 통일은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요즘 전 세계를 큰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소동은 개성 방문의 꿈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긴 병간호 끝에 남편을 먼저 보내 수심에 차 있을 그 무렵 또 하나의 슬픈 소식이 70대 중반의 노모를 놀라게 했습니다. 꽃다운 20대의 외손녀가 급사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첫 손주로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엄마와 동생, 세 식구의 가계를 돕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와 시집도 못 가고 일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사니 별 궂은 꼴 다 본다”고 경상도 사투리로 푸념하며 어머님은 슬퍼하셨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90 중반을 넘어 이 ‘별 궂은 꼴’을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2년 전 집사람을 잃은 뒤 저도 한때 건강이 나빠져 고생하였습니다. 건강이 많이 회복된 금년 들어 사촌 동생의 부음을 받은 뒤 얼마 안 가 이번엔 종갓집 조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에 살다 건강이 나빠져 춘천에서 요양 중이었습니다. 그밖에 몇 사람의 친지들의 부고도 신문에서 보고 제 나이를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100세 인간‘이라는 요즘 많이 듣는 구호에 편승하여 저도 한 3~4년만 더 살아 볼까 하는 욕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이번에는 다섯 살 아래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부음에 접했습니다. 그는 평생 교육계에서 일하다가 마지막으로 서울 어느 사립학교 교장직을 끝으로 은퇴하여 지병인 당뇨와 신장병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족동반의 점심 모임을 작년 말까지 오랫동안 계속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소동으로 이 식사 모임은 중단되었으나 며칠에 한 번씩 전화 연락은 꼭 하며 서로의 소식을 항상 교환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스포츠를 좋아하고 타고난 체력을 자랑하던 동생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한 것은 얼마 전 집안 욕실에서 낙상을 당해 엉덩이뼈를 다친 후부터입니다. 거동이 불편해지고 그렇게 잘 먹던 식사도 자연 양이 줄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다섯 살 터울의 둘은 어릴 적부터 떨어져 사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입학한 동생과는 단 1년 같이 학교에 다니고, 그 후 5년 동안 고향에서 떨어진 도시의 중학교에 다닌 저와 그는 방학 때에만 만나는 서먹서먹한 관계였습니다. 같은 중학교에 동생이 입학한 5년 뒤에 저는 졸업을 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 가 우리는 다시 떨어져 살았습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어 일본 군대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저는 곧 미군부대에서 일하게 되어 우리는 다시 헤어졌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일하고 있을 때 동생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동생이 여름방학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고향 남해(南海)는 한때 북한 인민군에 점령당해, 부산에서 일하던 저는 고향에 계신 부모와 방학으로 내려와 있던 동생과는 영영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인민군은 곧 후퇴하고 무사히 살아남은 가족들과도 연락이 되었습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한 동생은 부산에서 여러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대학 동기생들의 추천으로 서울 모 사립 고등학교의 창립준비위원회에 스카우트되어 서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젊었을 때 여러 사정으로 떨어져 살았던 세월이 길었던 만큼 우리는 파란 많던 인생의 마지막 장(章)을 마치 보상(報償)이나 받으려는 듯 극히 다정하게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말하는 기계치(機械痴)여서 휴대폰 하나 다루는 것도 서툽니다. 휴대폰이 스마트폰으로 발전되어 시골 노인네들도 많이 이용해 서울에 있는 손주와 화상통화도 즐기는 세상인데, 저는 열었다 닫았다 하는 구식 핸드폰을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전화국에서 무료로 교환해 드린다고 몇 번 연락이 왔지만 바꾸지 않았습니다.

단축 전화번호 이용도 아이들이 집안 식구 전화번호를 1에서 7까지 단축 입력해 주어 비로소 쓰게 되었습니다. 맨 끝 7번은 ‘엄마’로 되어 있습니다. 이 편리함에 재미를 붙여 자주 통화하는 번호 10여 개는 전화번호부라는 칸에 따로 저장하도록 아이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전화번호부 첫째에 동생 이름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제 핸드폰에 집사람과 동생 전화번호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 두 번호를 지우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또 저는 지우는 방법도 모릅니다. 전화를 사용하다가 두 번호가 눈에 띄면 야릇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즉 지금도 그 번호들을 누르면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빠질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 소용없게 된 두 번호이지만, 굳이 지울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먼 훗날, 아니 어쩌면 제가 죽을 때까지 제 휴대폰에 그대로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0-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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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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