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모리꼬네를 기리며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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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니오 모리꼬네를 기리며

2020.08.04

지난달 유명 인사들의 부음이 잇따라 들려와 마음이 착잡했어요. 하루 차이로 세상을 떠난 두 분(고 박원순 서울시장, 고 백선엽 장군)은 공과가 있어 애도와 추모 기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장례 절차와 장지를 두고 나라가 둘로 갈라진 채 연일 시끄러웠습니다. 지금도 여진(餘震)이 계속돼 울울답답하군요. 

두 사람보다 며칠 앞서(7월 6일, 이탈리아 현지시간) 유명을 달리한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 1928 ~ 2020)는 다른 경우입니다. 만인이 사랑한 엔니오 모리꼬네는 그동안 다섯 차례 아카데미영화제 음악상 후보에 올랐지만 인연이 없다가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2016)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연출한 서부영화 <헤이트풀 8(The Hateful Eight)>로 뒤늦게 오스카 트로피를 수상해 시청자들의 가슴을 적셨지요. 

   

     
영화 음악계를 주도하는 3인방이 있습니다. 존 윌리엄스(<스타워즈> <ET> <조스> <쉰들러 리스트>), 한스 짐머(<레인맨> <글래디에이터> <다크나이트> <인셉션>) 그리고 엔니오 모리꼬네입니다. 그의 필모그래피 역시 화려합니다. <황야의 무법자> <시네마천국> <미션> <러브 어페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모리꼬네는 휘파람, 타악기, 하모니카, 플루트 등 주변 악기를 차용한 실험적 기법과 함께 작품의 주제를 구현하는 깊이 있는 해석에서 단연 돋보입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엔니오 모리꼬네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을 만나면서 운명이 바뀝니다. 초기 대표작이자 이단적인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1964>와 후속 시리즈에서 할리우드의 정석적인 방식을 버리고 휘파람 소리와 남성 코러스 등 비주류 사운드를 도입해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이 곡은 50여 년도 더 지난 지금도 여러 장르에서 패러디가 될 만큼 인상적인 음악입니다. 휘파람 선율을 컬러링으로 사용하는 ‘아재’ 골수팬들도 있지 않은가요.

세르지오 레오네, 엔니오 모리꼬네와 함께 마카로니 웨스턴의 3대 창업 주주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필자가 처음 접한 것도 영화 <황야의 무법자>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서부영화의 문법을 파괴한 새로운 타입의 영화라고 신문들이 앞 다투어 소개했죠. <황야의 무법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用心棒)>를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서부극으로 번안한 영화예요. 주인공의 이름은 이름하여 '노바디(Nobody‧無名氏)'인데, 선과 악에 대한 일말의 개념 구분도 없이 두 갱단 사이를 오가며 철저히 자신의 이익만을 좇습니다. 그러니 존 포드 표 정통서부극의 주제인 권선징악에 길이 든 관객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했을 뿐.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이후 모리꼬네는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다 금주법 시대의 미국 내 갱스터 사회에서 벌어진 의리와 배신을 다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로 명예를 회복합니다. 암울한 화면과 대비되며 흐르던 서정적인 풀루트 선율은 영화에 비정함을 더했습니다. 그 후 영화 <미션(The Mission), 1986)>에 수록된 ‘가브리엘의 오보에(Gablriel's Oboe)’로 또다시 세인의 귀를 사로잡습니다. 이 선율은 나중 성악곡(‘넬라 판타지아’)으로 편곡돼 한층 더 친근합니다.

귀에 익은 모리꼬네의 음악은 그밖에도 많습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연출한 <언터처블(The Untouchables)>,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이 공연한 <러브 어페어(Love Affair)>, 소년과 늙은 영상기사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소녀를 향한 금지된 사랑을 그린 <로리타(Lolita)> 주제음악 등. 엔니오 모리꼬네는 니노 로타, 헨리 만시니, 모리스 자르 같은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우리 모두(60대 이상 신중년) 모리꼬네의 자장(磁場) 속에서 시나브로 성장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무법자’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모리꼬네의 절친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부탁해 극의 한 장면을 패러디해 봅니다. 불 꺼진 시가를 입에 문 허접한 사내가 황량한 서부 마을로 들어서는군요. 마침 ‘비정규직’ 무뢰배 너댓 명이 나무 펜스 위에 무료하게 앉거나 기대서서 시간을 죽이고 있어요. 구질구질한 체크무늬 판초를 걸친 못 보던 사내가 말인지 망아지를 타고 느릿느릿 다가오니(좋은 먹잇감이 나타나니) 키득거리며 놀릴 수밖에.

"꼬락서니하곤! 어디서 굴러먹은 개뼈다귀냐? 너 혼자 세상 근심 다 짊어졌냐?"

그러자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귀찮은 듯 웅얼대는 이 사나이 거동 보소. 귀 기울여보니 얼추 이런 내용이더라.

"그래 마음껏 비웃어. 너희들이 나를 보고 웃는 건 괜찮아. 근데 문제는 내 노새(Mule)야. 이 아이는 누가 자길 비웃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미거든. 그래서 있잖아, 너희들은 곧 죽을 거야. 그것도, 지금 당장! 아, 장송곡은 염려하지 마. 그 계통에 이력이 난 사람한테 부탁해 놓았으니까. 엔니오 모리꼬네라고, 알랑가 모르겄네. "

뒤따르는 집단 살육. 이윽고 허무에 찌든 사나이가 처진 어깨를 하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집니다. 휘파람 섞인 기괴하면서도 장중한 멜로디가 흐르며 서서히 화면 암전(暗轉). 디 엔드(The End)!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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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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