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부동산 정책 실패는 전세의 역기능 외면한 때문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어느 나라나 귀족의 부를 약탈해 궁핍한 평민들에게 재화를 나눠주었던 의적 이야기가 존재한다. 민초들은 영웅 한 명을 가슴에 담아 궁핍한 삶을 이겨낼 위안으로 삼았던 것이다. 영국 중세 시대의 로빈후드가 대표적이다. 우리 야사에는 유난히 의적이 많이 등장한다. 홍길동·임꺽정·장길산…. 그 만큼 선조들의 삶이 만만치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전세 낀 갭 투기에 대출·세제 혜택

다주택자에 조세피난처 제공한 셈


오늘날 더 이상 낭만적인 의적 이야기는 없다. 그저 영화처럼 도둑들이 있을 뿐이다. 현대 정부가 합법적으로 조세제도와 복지 정책을 통해 의적이 했던 부의 재분배를 적극 시행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케어를 비롯한 다수의 현 정부 정책도 부의 재분배에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유독 부동산 정책에 관한 한 서민을 보호한다는 현 정부의 선한 의지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의심이 그럴듯한 설득력을 갖는 건 구체적 사례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우리 집에서 정부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지방의 원룸에 살며 대학원에 진학 중인 둘째 아들이다. 학비는 대출을 받았지만, 집세는 부모가 내준다. 수요·공급의 불균형으로 지방의 원룸 가격이 서울대 근처와 맞먹는다. 소득이 없는 아들이나 집세를 내주는 부모는 소득공제를 전혀 받지 못한다. 주거복지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것이다.

 

석사학위를 받고 대기업에 근무하는 큰아들은 회사 근처 원룸에서 생활하는데 연간소득 7000만원 이하에 해당해 최대 90만원의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 세후 소득의 3분의 1에 가까운 액수를 집세로 내는 청년이 돌려받는 세제 혜택은 턱없이 작다. 청년들에게 이 땅에서 결혼하고 애 낳으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는 이유다.

 

시댁 식구들이 우리 집에 살게 되면서 공직자는 물론 공직을 했던 사람도 당연히 1가구 1주택이어야 한다며 10년 넘게 전셋집을 전전하는 우리 부부는 그나마 공적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편이다. 5억원을 신용대출하면 이율이 3.7%가 넘지만, 전세자금을 대출받으면 이율이 2.5%라서 우리 부부는 연 600만원 이상의 이율 차액을 공적 부조로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주택 부자의 형편은 어떨까. 박근혜 정부에서 도입돼 현 정부에서 확대된 주택임대사업자 등록법(주임사법)은 어차피 전세를 끼고 갭 투기를 하는 다주택자에게 대출 특혜는 물론 엄청난 세제 혜택을 주었다. 특혜가 일부 축소됐지만 주임사법은 여전히 이들의 갭 투기를 가능하게 해 부동산 위기의 주범이 됐다고 다수의 전문가는 입을 모은다. 정부가 다주택 투기자들에게 합법적인 조세피난처를 제공한 셈이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은 물론이고 당(黨)·정(政)·청(靑)의 선한 의지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주택 공직자들의 집을 처분하라는 결정도 민심에 민감한 정부였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부는 서민의 전·월세 안정을 명목으로 서민의 고혈을 짜내 집 부자들에게 재분배하는 역(逆)로빈후드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임대의 공적 기능을 하고 있는 월세와 달리, 금융이 미발달한 과거에 순기능을 했던 전세가 역효과를 내고 있음에도 이를 외면한 데 있다. 과거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사고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은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선진국에 전세가 없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당정은 아직도 전·월세를 구분하지 않은 채, ‘임대차 3법’ 통과를 서두르고 있다. 이번 위기가 지속가능한 부동산 입법을 패키지로 통과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문재인 정부에게는 천운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등산 중 조난이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지만 대부분 대형사고는 1차가 아니라 2차 사고에서 일어난다. 이번 부동산 대책은 신중하고, 충분히 여론을 수렴해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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