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유월을 돌아보며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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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유월을 돌아보며

2020.07.02

지난달 25일은 6·25 동란 7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구천을 떠돌던 국군의 고혼들이 그날 자신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조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발굴, 미군으로 추정되어 하와이의 미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에 옮겨졌던 유해 가운데 한국군으로 판명된 147구가 70년 만에야 고국 땅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국군 유해 발굴 소식이 전해질 때면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떠오릅니다. 피가 뜨거웠던 젊은 시절 외고 다니던 모윤숙의 헌시(獻詩)도 생각납니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70년 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은 예고 없는 남침으로 ‘우리민족끼리’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3년 1개월 2일(1,129일) 동안의 전상(戰狀)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밀고 밀리는 전투에서 남북의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와 실종자가 2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유엔군과 중공군을 합치면 인명피해는 350만 명에 이릅니다. (이상은 국가기록원 자료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숫자로 발표된 자료도 많음). 남북한 인구 3천 만을 헤아리던 땅에서 거의 1천 만이 이산(離散)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삶의 터전은 처참히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얼마 전 양평 사는 작은형님 생신 축하로 형제자매가 모였습니다. 코로나로 근신하다 모처럼 만들어진 자리였습니다. 오가는 이야기 중 잃어버린 고향 흥남(興南)의 추억도 절로 화제에 올랐습니다. 누님은 동란 중 이층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폭격에 구멍이 뻥 뚫려 새파랗게 질렸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가까운 산비탈에 아버지와 큰형님이 임시 방공 굴을 만들던 기억도 생생하답니다. 다섯 남매 중 막내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 서너 달 후 피란길에 올랐으니 삶의 출발부터가 고난이었던 셈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던 작은형님은 아버지 손목 잡고 해수욕 갔던 일, 근처에 주둔한 국군들을 집으로 이끌고 와 음식을 대접하게 했던 일들을 기억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피란은 뜻밖의 사고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상을 차리는 중에 평소 드나들던 국군이 뛰어들어 당장 집을 비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이르더랍니다. 남편이 출타 중이고 가재가 널렸는데 어떻게 떠나느냐? 그래도 며칠 동안은 집을 비워야 산다. 그래서 좀 귀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물건, 양식 보따리를 꾸려 떠난 게 고향과의 영원한 이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다섯 남매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섬 거제도였습니다. 학교 교실, 어장 창고로 옮겨 다니며 아이들 잠자리를 걱정하던 때였습니다. 간신히 한 주민의 작은 방을 얻어 며칠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답례로 싸 들고 내려온 옷감을 골라 예쁜 옷을 지어 주인집 딸에게 입혔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들고나며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옷 자랑을 했습니다. 소문 덕에 여기저기서 옷 지어달라는 주문이 밀려들었습니다. 규방 수업으로 닦은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홀로 다섯 아이들을 키우는 생업의 밑천이 된 것입니다.

소문이 소문을 낳아 건넛마을, 산 너머 마을에서도 일감이 들어왔습니다. 딸자식 출가에 대비해 소중히 보관하던 옷감을 통째로 품삯과 함께 등짐장수에게 들려 보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옷을 짓고 남은 옷감 역시 등짐장수 편으로 되돌려졌습니다. “그곳 사람들의 선한 인심이 없었더라면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겠니.”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거제도 주민들의 순박하고 따뜻했던 마음씨에 고마워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눈부신 발전에 가려 6·25 동란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젠 아스라이 잊혀 가는 과거사가 되었습니다. 전화(戰禍)의 고통을 모르고 자란 세대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은 끝난 게 아닙니다. 이산과 실향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가슴속엔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크고 깊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양평 모임엔 몸이 불편한 큰형님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큰형님에 얽힌 얘기가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철도 덜 났을 중학생 나이에 폭격을 피해 방공 굴을 파던 얘기, 고달픈 피란살이에서도 어머니를 도우며 막내를 절대 남에게 주어선 안 된다고 고집하던 얘기, 성냥 한 갑을 큰돈에 팔아 기뻐했는데 고구마 몇 개 값밖에 안 되더라는 얘기…

어릴 적 자주 들었던 큰형님의 망향가가 떠오릅니다. 제목도 지은 이도 모르지만 곡조와 가사는 지금껏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세차게 가슴을 옥죄어 끝까지 불러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날은, 우리 가슴속 슬픔이 영원히 가실 날은 언제일지. 한 맺힌 이 노래를 가슴 활짝 열고 불러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일지.

저 멀리 흥남이라 아득한 내 고향
기다리는 부모와 형제 그립습니다
야속하다 삼팔선아 내 어이 이별이냐
옛 추억이 그리웁구나 어머님 품에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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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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