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죄와 북한의 벌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전형적인 ‘미치광이 전략’이다. 느닷없이 “죗값을 치르라”라는 북한 김여정의 불호령에 대한민국은 졸지에 죄인이 됐다. 영문도 모른 채 ‘네 죄를 이실직고하라’는 인민재판에 끌려 나온 기분이랄까. “징벌의 불벼락”이라며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잿더미로 만들어도 변변한 항의조차 못 했다. 욕설을 퍼붓고, 군사 도발이라도 할 듯 공포 분위기로 몰더니 돌연 ‘대남 군사행동 보류’를 통보했다. 지난 4일 ‘삐라 응징’ 담화로 시작된 ‘죗값사태’는 벌 집행을 유예한다는 김정은의 ‘선처’(?) 덕에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백두혈통 오누이의 역린을 건드린 건 뭔가. 문재인 정부와 집권당은 변명거리를 찾느라 호들갑을 떤다. ‘북한의 배신자’ 탈북민들이 살포한 삐라 탓, 미국 사대주의 외교 탓, 보수 언론 탓을 들먹인다. 한국 정부의 협상력을 부정적으로 폭로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훼방 탓도 거론했다. 이 황당한 죗값사태를 이해하려면 내재적(內在的) 접근법을 끌어와야 한다. ‘남한의 죄, 북한의 벌’ 사이 상관관계를 북한 내부의 눈으로 보자는 얘기다. 죄는 크게 세 가지다.

 

 

‘죗값 치르라’는 김여정의 불호령
불경·기만·망신 죄 묻겠다는 의도
균형감 잃은 내재적 접근론자들
혼돈 사태에 성찰하고 책임져야

불경죄. ‘최고존엄’ 김정은은 무오류와 동의어다. “최고존엄만은 목숨을 내대고 사수한다”는 게 북한이다. 그런 인민에게 ‘위선자 김정은 끝장내자’ ‘형님을 살해한 악마’ 같은 삐라를 뿌렸으니 당연히 불경스러운 모독이다.

기만죄. 2018년 ‘한반도의 봄’으로 돌아가자. 2017년 말 한반도는 북한의 핵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실험 때문에 전쟁의 먹구름에 갇혀 있었다. 2018년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에 북한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하고, 김여정을 서울로 보내 대화의 물꼬를 튼 게 김정은이었다. 그해 4·27 판문점과 9·19 평양 남북 정상회담 당시 두 정상의 판문점 도보다리 밀담과 백두산 천지 관광,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능라도 경기장 연설은 감동적인 그림이었다. 남북의 대포와 총구에서 화약 대신에 꽃가루가 흩뿌려질 듯했다. 문 대통령은 “남북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자”고 다짐했다. 개성공단 정상화, 남북 철도 연결, 북미 수교 등 달콤한 말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김정은이 쥔 건 찢어진 선언문과 추억의 기념사진이 고작이다. “번지르르하게 말보따리” “달나라 타령”에 속았다는 게 북한의 판단이다.

 


망신죄. 김정은은 중재자 문 대통령을 굳게 믿고 체면을 접었다. 2018년 6월 중국 비행기를 빌려 타고 싱가포르에 갔고, 2019년 2월 기차로 66시간 동안 4500여㎞의 여정 끝에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연 것까지는 좋았다. ‘영변 핵시설만 폐기하면 유엔 제재가 해제될 것’이라는 한국의 훈수대로 협상했다. 트럼프가 넙죽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우리 조언과 달리 트럼프는 북핵을 완전 파기하는 빅딜(big deal)을 요구하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정은에겐 ‘하노이의 굴욕’으로 각인됐다.

이후 남·북·미 정상들의 판문점 회동마저 요란한 ‘쇼’에 그쳤다. ‘평양에 트럼프 타워 건설’도, ‘제2의 베트남 성공 신화’도 허공으로 사라졌다. 작년 3월 “흰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좋은 집”을 약속한 최고존엄의 공언은 실없는 소리가 됐다. 대북 제재에다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악몽이 어른거린다. 운전자를 잘못 만났다가 정말 벼랑 끝에 몰린 셈이다.

이런 내재적 접근법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는 ‘유죄’다. 불경은 말할 것도 없고, 헛바람을 집어넣은 기만죄가 성립되고, ‘하노이의 굴욕’을 안겨 국제적 망신을 초래했다. 이게 바로 김여정이 묻겠다는 죗값이리라.

 


죗값은 내재적 접근을 신봉하는 이 정권의 주류 세력이 자초했다. 그들은 주사파 운동권 출신으로 진보를 자칭하며 대북·대미 협상을 주도했다. 핵 무장에는 눈 감고 무조건 북한 역성만 들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을 오도해 죗값사태를 촉발한 장본인이다. 이제서야 김여정의 노기에 화들짝 놀라 ‘삐라금지법’ ‘종전선언’ 등을 내밀며 눈치를 본다. 요즘 거대 여당의 독주를 보면, ‘탈북민 북한 송환법’ ‘북한 비판 금지법’도 갖다 바칠까 겁난다. “군사행동 보류 재고 땐 재미없다”는 북한이 언제 돌변해 벌을 내릴지 모른다. 어설픈 중매가 이렇게 무서운 혼돈을 낳고 있다.

지금이라도 현 정권은 북한에 실토해야 한다. 독자적으로 대북 제재를 풀어낼 힘이 없다는 점,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을 말이다. 그저 “인내하자”며 체념적으로 대응하니 국민이 죄인인 양 험한 꼴을 당한다. 균형 감각이 퇴화한 내재적 접근론자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죗값사태는 재연될 수 있다.

이건 꼭 따져야겠다. 권력 주변 인사들은 문 대통령에게 ‘달빛 소나타’를 헌정하고 태종·세종으로 칭송하며 떠받든다. 문 대통령 비판 대자보를 하나 붙였다가 죄인이 되는 험악한 시대다. ‘냉면 처먹고 요사 떠는 철면피’라는 북한의 막말에 침묵하는 이중잣대도 과연 내재적 접근법인가.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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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gi, conpaper E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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