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서 첨벙거리면서도 잘살 수 있어, 힘내렴

[우리 손주에게]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힘들고 막막하다는 이 시대 젊은이들을 위해 인생 선배들이 가슴속에 품었던 말을 꺼냅니다. 오늘은 한국을 대표하는 진화·사회생물학자이자 국립생태원장을 지낸 최재천(66) 이화여대 석좌교수입니다.


 

최재천 교수는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지레 포기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 /주완중 기자


뜻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아 고민이라는 얘기가 너희한테서 요즘 부쩍 많이 들리더구나. 내 얘기를 좀 들어볼래? 지금은 과학자로 불리지만, 고교 시절까지도 난 문과 아닌 곳으로 진학하는 걸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없었단다. 중학교 때 친구들 따라 경복궁 백일장에 참가했다가 시를 써서 떡하니 장원이 됐지. 시인 장만영 선생이 뽑아주신 거였어. 




'난 시인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착각을 품고 살게 됐지.


하지만 '산업 중흥'이 나라의 구호였던 시절, 학교에선 강압적으로 학생들을 이공계 대학으로 보내려 했지. 교장실 앞에 이틀을 무릎 꿇고 앉아 농성했는데도 잘 안 됐어. 서울대 의대에 원서를 썼다 떨어지고 재수했다가 또 떨어졌는데, 그해 서울대 동물학과에 2지망으로 붙었어. 알고 보니 고3 때 담임선생님이 원서 빈칸에다 그 과를 써넣은 거였지. 전혀 흥미가 없는 분야라고 생각해서 수업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어. 교외선을 타고 아무 역이나 내려서 개울에서 가재를 잡다가 시를 쓰는 게 일상이었지.


대학교 4학년 때 조지 에드먼즈 미국 유타대 교수가 학교로 와서 날 찾았어. 곤충학자였지. '한국에서 채집할 건데 조수로 쓸 만한 사람이 있느냐'고 수소문했는데 전에 서울대에 교환교수로 왔던 한국계 교수가 '개울이라면 빠삭하게 아는 학생이 있다'고 날 소개했던 거야. 그는 나와 함께 일주일 동안 전국의 개울을 누비며 하루살이 유충을 채집했어. 신발도 벗지 않고 첨벙첨벙 뛰어들더라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 '참 하찮은 거 연구하네. 멀쩡한 영감탱이가….'


그가 돌아가기 전날 함께 맥주를 마시다 물어봤지.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물끄러미 날 보던 에드먼즈 교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하더니 이렇게 말했어. "난 유타대 교수다. 야경이 펼쳐져 보이는 산 중턱 저택에 살고, 플로리다엔 별장이 있다. 금발 미녀와 결혼했고, 채집하러 세계를 돌아다니는데 한국이 102번째다."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 난 개울에서 첨벙거리는 거라면 자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서도 잘살 수 있구나! 나중에 그분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무릎을 꿇고 "아이 라이크 유(I like you)"라고 외쳤다는 거야. '난 당신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하려던 거였는데 '난 당신을 좋아한다'로 말이 헛 나왔던 거였지. 그는 "그럼 미국으로 유학을 오라"고 하더니 종이에 하버드대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이름을 써 줬어.


그때부터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어.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석사과정을 하면서 윌슨 교수가 쓴 '사회생물학'을 읽는데 가슴이 마구 뛰더라고. '인간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있었어.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바로 이 분야구나…. 용기를 내 윌슨 교수에게 편지를 썼고, 하버드대에 들어가 그분 밑에서 박사 논문을 썼지.


모든 게 그저 기막힌 우연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 난 방황했을지라도 방탕하게 산 것은 아니었어. 뭘 하고 살면 좋을지 끊임없이 진로를 탐구했지. 작가가 될까, 아니면 외교관, 아나운서, 연극배우…. 누군가 그러더구나. 그런 꿈들이 그냥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 현재 내 삶에 조금씩 녹아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지레 포기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야. 끊임없이 뒤지고 두들기고 쑤시며 미답의 길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 기회는 오는 거지. 기회란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맹탕으로 앉아서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한탄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거야.

조선일보 정리=유석재 기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29/20200529044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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