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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란 괴물, 경계해야

2020.06.01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살면서, 근래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이념 간 갈등’을 지켜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성만이 판을 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와 관련해 두어 가지 단상이 스쳐갑니다.

# 나치 독일은 ‘이념 쏠림’의 산물입니다.
1960년대 초 독일 유학 시절의 일입니다. 하루는 지도교수와 대화를 나누던 중 독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책을 읽으면 좋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교수는 필자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독일은 물론 유럽 역사와 그 사회를 이해하려면, 유대인 문제를 빼놓고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무렵 필자는 나치 독일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영화 <Anna Frank 소녀의 일기>를 보고 가슴 아파하는 수준이었던 터라 교수의 말이 조금은 생소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교수가 추천한 책은 《곡과 마곡(Gog und Magog)》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로 살아 있는 신성(神聖)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의 저서였습니다.
필자는 그 책에서 Poland의 수도 Warszawa에 소재한  유대인 집단거주지인 <Ghetto>가 폴란드인에 의해 조성된 ‘격리거주단지’로 알았는데, 실은 유대인이 능동적으로 조성한 단지임을 밝히면서, 저자는 유대인의 자성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생활에 익숙해지고 점차 적응해가면서,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의 생각에는 의외로 깊은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1960~1970년대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폭로하는 관련 서적이 봇물 터지듯 세상 밖으로 몰려나오던 때와 궤를 같이했습니다. 아마도 전쟁이 끝난 후 많은 독일인이 그네들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다양한 생각을 자연스레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 한 권의 책이 유난히 독서계의 ‘총아’로 우뚝 떠올랐습니다. 독일의 저명한 일간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의 기자 Joachim C. Fest가 10여 년의 집념 끝에 내놓은 《히틀러(Hitler)》 (Propylaeen, 1973) 라는 묵직한 책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악몽과도 같은 나치 독일의 핵심 인물이라 점에서 당연히 관심의 대상이었으니 출판되자마자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이 책은 나치 독일에 대한 그네들의 숨겨진 관심을 표면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히틀러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도대체 독일 전 민족이 그리도 철저하게 속았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절실했던 시대적 욕망도 크게 한몫했을 것입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아돌프 히틀러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이면 한 ‘방문객’이 홀어머니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 남자는 바로 동네의 부유한 유대인이었는데, 위 책의 저자는 아마도 어린 아돌프의 반유대인 정서가 그때 이미 싹텄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저자는 아돌프가 일찍이 초등학교 4학년 즈음부터 ‘국수주의 사상’에 깊이 빠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 이유로 아돌프의 학교 성적을 제시합니다. 아돌프는 대체로 하위권에 머물던 별로 우수하지 않은 학생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역사과목이나 지리과목은 아돌프가 그나마 좋아한 교과목이라 손꼽았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어린 아돌프가 1850년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낭만주의(Romantism)와 1890년대를 풍미한 신낭만주의(Neo-Romantism)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낭만주의 사상을 독일 문화의 위대함과 연결시킨 ‘국수주의(Nationalism)’ 흐름에 소년 아돌프가 경도된 것은 당대의 일반적 추세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밤손님’인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반감이 나치 독일을 피로 물든 크나큰 역사의 굴레로 이끈 여러 요소 중 하나라고 지적하는 저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동시에, 청소년기에 히틀러가 받은 ‘이념주의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필자는 이념이라는 플랫폼(Platform)에는 냉철한 이성보다는 뜨거운 감성이 설치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편견과 오만이 싹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념에 빠진 그림 한 점
시대적 흐름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명작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18~19세기 로맨티시즘을 대표하는 작가 지로데(Anne-Louis Girodet-Trioson, 1767~1824)는 ‘마라의 죽음 (The Death of Marat, 1893)’이란 불후의 명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히포크라테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선물을 거절하다(Hippocrates Refusing the Gifts of Artaxerxes, 1792)’라는 그림으로 우리를 한없이 놀라게 합니다.

기원전 450~350년경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한 히포크라테스는 모든 의사가 의업(醫業)에 종사하면서 그의 이름에 따라 하는 선서(宣誓)로도 더욱 친숙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히포크라테스는 의사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행동 지침을 만듦으로써 시대성과 지역성을 뛰어넘는 의성(醫聖)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화가는 그 선서 내용 중 한 부분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의성 히포크라테스의 명성을 들은 이웃 나라 페르시아 제국의 제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먼 길을 무릅쓰고 직접 찾아와서는 많은 비단과 술 그리고 금은보화를 줄 터이니 위독한 자신의 부친에게 의술을 베풀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화가는 이러한 역사적 일화를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 “나의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의술을 베풀겠노라”라는 대목과 연관 지어 화폭에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금은보화를 의성의 발밑에 깔아놓고 단호히 거절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를 의성의 품위를 지키는 의연한 모습으로만 보기에는 왠지 히포크라테스 정신과 거리감이 있습니다. 환자를 보살피는 데 어떠한 차별도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선서 구절과 배치되는 부분입니다.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해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라는 선서 말입니다. 국적과 종교가 다른, 그리고 그리스의 오랜 숙적 국가 페르시아인을 경멸하며 무시하는 듯한 히포크라테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의성다운 관대함이나 인자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1789년 혁명 직후 프랑스 사회를 지배한 ‘우월주의’ 사상을 등에 업은 낭만주의 화풍과 맥을 같이합니다. 그리도 추앙하는 의성의 지침도 감성이 지배하는 시대 이념에는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의 두 가지 사회 현상을 살펴보며, 필자는 근래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바람몰이 같은 이념주의 추종 현상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념이란 핑계로 몰아치는 광풍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념의 그늘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모호해지는 쏠림 현상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념이라는 괴물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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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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