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사회는 죽었는가"


[윤평중 칼럼] 한국 시민사회는 죽었는가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미향 사건에서 문 정권은 친여언론·시민단체 총동원해

여론 조작으로 교란하는 게 조국 사태와 똑같다

국가 의한 시민사회 식민화는 민주주의의 자기부정이자 거대한 역사의 후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사태가 일파만파다. 윤미향 전(前) 정의연 이사장(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당선인)을 둘러싼 추문은 한국 시민운동의 변질(變質)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권력을 감시하는 파수꾼에서 이권단체로 전락한 시민단체도 역사적 배경이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운 시민운동은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적 의제를 발굴하고 인권 감수성을 높였다. 거액의 성금 횡령 및 배임 의혹 당사자인 윤미향 당선인조차 위안부 문제를 국제인권운동으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시민운동과 현실정치의 상호 침투는 필연적으로 시민단체의 권력화를 낳는다. 시민운동이 운동가의 출셋길로 악용된다. 이는 보수·진보 진영에서 두루 나타나지만 특히 진보 정권에서 두드러진다. 힘 관계에서 약세(弱勢)였던 한국 진보는 시민운동과의 전략적 연대를 정권 장악의 지름길로 삼았다. 운동가들 자신도 권력에 투신해 관직과 이권을 얻는 행위를 현실 참여로 미화한다. 한국 시민운동의 권력 지향성은 촛불 정부를 자임한 문재인 정권에서 정점에 이른다.




정권과 어용 시민단체들은 이해관계를 공유한 한 몸이다. 비정부기구(Non-Governmental Organization)가 친(親)정부기구로 변신하고 비영리단체(Non Profit Organization)가 이권단체로 타락한다. 조국 사태로 정권이 궁지에 몰리자 진보시민단체가 총출동해 살아 있는 권력을 엄호하는 행태가 정의연 사건에서 반복된다. 정권과 시민운동이 일체화할 때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의 식민화(植民化)'가 시작된다. 한국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참여연대 활동가 다수가 문 정권 권력 핵심부에 진출하고 참여연대의 정책 제안들이 정부 정책으로 실행되는 게 단적인 증거다. 참여연대는 5월 19일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인권침해'와 '검찰정치'로 규정했다. 여론과는 충돌해도 문 정권의 인식과는 완전히 일치한다. 정치권력과 시민운동의 합체(合體)는 시민사회에 치명적이고 나라에도 극히 해롭다.


세계사적으로 현대(modernity)는 국가와 시장을 견제하는 제3의 독립 영역인 시민사회와 동행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좋은 나라는 국가·시장·시민사회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정체(政體)다. 국가와 시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인권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엔 시민사회가 없고 국가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한다. 두 나라에 민주주의와 인권이 없는 건 시민사회 부재의 필연적 결과다. 철학자 헤겔의 통찰처럼 '시민사회 없이 현대세계도 없다.' 결국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의 식민화는 한국 민주주의의 자기부정(否定)이자 중세로의 퇴행을 뜻한다. 거대한 역사의 후퇴다.


시민사회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이런 역사철학적 이해가 있어야 정의연 사태의 함의를 정확히 판독할 수 있다. 윤미향 사건은 시민운동의 자기 해체를 가리키는 중대 징후다. 조국 전 장관과 판박이인 윤미향 당선인을 결사 옹위하는 문 정권과 시민단체들의 통일전선은 한국 시민운동의 총체적 부패를 증명한다. 행정·입법·사법을 독점한 최고 권력자인 문재인 대통령을 성군(聖君)으로 기리는 용비어천가는 한국 사회가 신(新)중세로 퇴행하고 있다는 증거다.




'강한 국가'를 견제하는 '강한 시민사회'는 한국 특유의 위대한 성취였다. 강한 국가가 압축 근대화의 성공으로 중산층을 낳고 중산층이 이끈 강한 시민사회가 민주화를 선도했다.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의 선(善)순환이다. 한국이 코로나19를 선방(善防)한 것도 강한 국가와 강한 시민사회의 협력과 견제의 산물이라는 문명사적 서사(敍事)로 승화된다. 문재인 정권이 시민사회를 식민화하는 현실은 이런 대한민국의 기적을 위협한다. 현대 한국의 경이로운 성공을 추동한 독립적 시민사회의 토대를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연 사태에서 문 정권은 친여 언론과 시민단체를 총동원해 탈진실(Post-truth)을 양산하는 진지전(陣地戰)에 나섰다. 대대적인 여론 조작으로 공론장을 교란하는 게 조국 사태와 똑같다. 하지만 민심의 공분(公憤)은 정권과 어용 시민단체들의 공동 전선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강대한 국가가 민심의 역린을 건드릴 때 국가라는 배를 뒤집어버리는 게 한국인이다. 한국 시민사회는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행동으로 역사의 물길을 바꾼다. 윤미향 사건이 우리 모두에게 생사(生死)의 물음을 던진다. 한국 시민사회는 죽었는가.

조선일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21/20200521049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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