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만년필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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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만년필

2020.05.12

엄지를 올리며 “토마스 만은 최고야.”하는 어떤 분의 이 말 한마디에 저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뒤적여야 했습니다. 으스스한 제목 때문에 수십 년 전 공포소설로 착각하여 잡자마자 내려놓았던 <마(魔)의 산(山)>은 어렵고 지루한 책이었습니다. 뭐든 따라 하고 싶은 분의 말씀이라서 저도 토마스 만의 책을 읽고 엄지를 척하고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만의 만년필’ 역시 꼭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였습니다.

한동안 토마스 만을 열심히 조사했습니다. 정말 운 좋게도 만년필을 들고 있는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1939년에 촬영된 것이었습니다. 토마스 만은 의자에 앉아서 안경을 쓰고 입에 담배를 문 채 자기가 지은 책 몇 권을 무릎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만년필을, 왼손으론 책의 겉장을 잡고 속지에 서명하고 있었습니다. 흑백사진이고 만년필은 작게 보이지만, 모델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했습니다. 저작권이 있는 유료 사진이라 사진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다행히 이것과 같은 만년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 며칠 뒤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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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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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은 은회색 줄무늬가 사선으로 들어간 미국 워터맨사(社)의 잉크 뷰로 1930년대 아르데코 형식의 전형적인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토마스 만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해 2년간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 교수로 지낼 때 구입한 것같습니다. 1930년대 후반 만년필의 종가(宗家) 워터맨은 파커와 셰퍼에 밀리고 있었고, 당시 가장 인기 있던 만년필은 파커의 버큐메틱이었습니다. 때문에 생산 기간과 숫자도 적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파커의 버큐메틱보다 훨씬 적습니다. 토마스 만은 왜 저 만년필에 끌렸던 것일까요? 이제 그의 책을 읽어야 할 때입니다.

워터맨 잉크 뷰(Waterman Ink View silver ray 1935~1940)

이번엔 예전과 달리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두툼한 노트 한 권과 만년필 몇 자루를 준비하였습니다. 지루해지면 필사(筆寫)를 하여 그 고비를 넘길 요량으로 말입니다. 앞부분은 별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권이 끝나고 2권에서 새로운 인물 나프타가 등장하자 책은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는 만나면 논쟁을 했는데 상당히 지루했습니다. 고비가 마침내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장의 카드인 만년필을 잡았고, 어렵거나 지루한 부분은 필사를 했습니다. 고비가 지나니 책은 술술 잘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다 읽는 데는 10일 정도 걸렸습니다. 70페이지 정도 필사를 하느라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습니다. 5월 황금연휴 내내 열심히 <마의 산>을 읽었습니다. 시간은 아주 빨리 갔습니다.책을 다 읽고 나니 토마스 만이 은회색 워터맨 만년필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반갑게 만년필이라는 단어가  한 번 언급되었지만 구체적인 묘사가 전혀 없어 이것이 힌트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취향입니다.

아래는 책에서 표현된 주인공의 소지품과 주요 인물에 나타난 컬러입니다.

1. 손목에는 백금으로 된 사슬 모양의 팔찌를 찼고(한스 카스토르프의 팔찌)
2. 그의 눈은 청회색이거나 회청색이어서(히페의 눈동자)
3. 그것은 은으로 도금한 연필로서...(히페의 연필)
4. 먼 산처럼 회청색이나 청회색을 띠는 눈(쇼샤의 눈동자)
5. 은제 연필을(쇼샤의 연필)

<마의 산>에 등장하는 인물 소개를 하면 한스 카스토르프는 주인공으로 24세의 청년입니다. 히페는 한스 카스토르프가 13세 때 다니던 학교에서 호감을 가졌던 학생이고, 히페를 닮은 쇼샤는 한스 카스토르프가 요양원에서 사랑에 빠지는 러시아 여성입니다.

제시된 5개의 표현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나요? 한스 카스토로프. 할아버지와의 추억에서도 그가 좋아하는 1650년에 만들어진 세례반(洗禮盤)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은(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오래된 세례반은 극 전개상 매우 중요한 물건입니다. 정리하면 모두 은색 계열입니다. 취향은 소지품에서 읽을 수 있고 거꾸로 소지품으로 취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상의 만년필이 책 어디에 슬쩍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이상할까요? 저는 하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습니다. 만년필의 수수께끼는 풀렸습니다. 하지만 엄지 척은 아직입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힘들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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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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