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라 읽고 문예라 쓴다 (上 문학과 문예)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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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 읽고 문예라 쓴다 (上 문학과 문예)

2020.04.22

시나 소설을 쓰고 희곡 등 문예 작품을 빚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문학’이라고 합니다. 문예지나 신춘문예 등에 공모하기 위해 습작품을 쓰는 사람들도 ‘예비 문학인’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문예 수업의 교과서 이름도 ‘문학’이며, 일반 서술문이나 서사에서 멋진 글이나, 심오한 뜻을 품고 있는 글을 볼 때도 통상 ‘문학적으로 썼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의 특별활동에서는 ‘문학반’이 아닌 ‘문예반’이라고 하고, 대학에서도 ‘문학창작과'라고 하지 않고 ‘문예창작학과’라 합니다.

이처럼 ‘문학’과 ‘문예’가 지향하는 길은 같지만, 명칭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육현장이나 실전에서도 아무런 혼란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문학적’, ‘문예적’을 적당히 사용하면 됩니다. 예컨대 부산에서 경상도로 가나 전라도로 가나 서울만 가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문학’과 ‘문예’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도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러한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이른다. 〔문예〕는 미적 현상을 사상화하여 언어로 표현한 예술작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해석되어 있습니다.

‘문학’과 ‘문예’가 지향하는 목적이 같지만 ‘문학’과 ‘문예’를 구분 지음으로써 교육 효과나 실전에서 얻을 수 있는 예술효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이번 회를 포함한 3회 동안 제가 실전과 교육현장에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토대로 ‘문학’과 ‘문예’는 반드시 구분 지어야 한다는 타당성에 대한 소회를 밝혀 보겠습니다.

우선 ‘문학’은 ‘문예’를 포함한 ‘글을 매개로 하는 모든 학문’을 통칭하는 명사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이 있는가 하면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어 몸젠외 다수의 철학자와, 정치인 윈스턴 처칠도 있습니다. ‘문학’의 범위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실례라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하나의 학문입니다. '학문’은 말 그대로 지식을 배워서 익힌다는 뜻입니다. ‘지식’은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입니다. 즉 ‘앎’을 뜻합니다. ‘앎’은 안다는 것이고, ‘앎’을 전제로 하는 예술 행위는 복제품을 양산할 여지가 다분합니다.

문인이 되거나, 문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저처럼 독학으로 깨우치거나, 교육기관을 통해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일반인들은 문화원이나, 문화센터, 평생 교육기관 등에 등록을 해서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교육을 받습니다. 아니면 ‘문예창작학과’가 설치되어 있는 대학에 등록을 해서 교육을 받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82개 대학이나 대학교에 ‘문예창작학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문예창작학과’는 말 그대로 ‘문예창작’에 대한 지식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과입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진진은 거의 시인이나 소설가, 희곡작가,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교수이기 전에 선배 문인들로부터 어떻게 글을 쓰는지에 대한 문예에 대한 지식을 학문적으로 전수받습니다.

예술과 학문은 분명히 틈새가 있습니다. 학문은 기왕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예술은 기왕에 있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교수는 학생들이 춤을 출 수 있는 마당만 열어 주어야 합니다. 어떠한 형식으로 춤을 추는지에 대해서는 오롯이 학생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현실이 그럴까요? 교수는 학생들이 춤을 추는 방법은 물론 자세까지 교정을 해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시(詩)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처럼 시를 쓰려는 학생들도 시를 취하려는 방법이 각각일 것입니다. 교수가 모더니즘 성향으로 시를 쓰고 있다고 해서, 학생들도 모두 모더니즘 시를 쓴다면 창조보다는 답습에 가깝습니다.

‘시적 허용’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시에서만 특별히 허용되는 비문법성을 말합니다. 시의 특성에 있는 ‘운율’에 맞추기 위하여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라도 허용이 된다는 말입니다. 학생들에게 ‘시적 허용’에 대하여 교육을 할 때는 정확하게 이론이 적립되어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시적 상상력’이란 용어도 교수의 몫은 ‘시적 허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까지입니다. ‘시적 상상력’을 발현하는 방법은 학생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현실은 교수의 성향에 따라서 ‘시적 상상력’을 발현하는 방법이 천차만별로 설명이 되거나 다른 작품의 예를 들어서 차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 방법은 교수와 시적 성향이 같은 학생들은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유롭게 예술성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예술가의 상상력이 경직되어 있다면 작품의 예술성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서 예술의 발전에 저해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문예는 예술의 하위 장르입니다. 시는 문예의 하위장르로 느낌이나 사상을 운율이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입니다. 소설은 작가가 경험한 사실을 허구를 통해 미적으로 서술한 서사 문예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운율’과 ‘미적’은 예술성입니다. 시와 소설이 예술적으로 씌어야 한다고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시는 언어를 창조해야 하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창조해야 합니다. ‘창조’는 예술에서 추구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조물주처럼 없는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고, 기왕에 있는 것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의 창조와 가깝습니다. 이처럼 시와 소설은 물론 희곡에도 예술성이 가미되어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문예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론’부터 교육받아야 합니다. 예술이 뭔지 알아야 예술적인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겁니다.

현재 대학이나 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서 ‘예술론’을 필수과목이나 선택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학’을 교양과목으로 듣는 학생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예술론’을 교양과목으로 듣는 학생들도 소수일 것입니다. 물론,  ‘예술론’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문예작품이 지향하는 꼭짓점이 예술성에 있으니까, 굳이 ‘예술론’을 학습받을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성을 앞세워 문예 행위를 하는 것이 지름길이고, 문학성을 앞세운 것은 돌아가는 길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다음 회에는 '문예와 예술'에 대해서 올리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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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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