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투표를 한 사연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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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를 한 사연

2020.04.16

작년엔 두세 달에 한 번꼴로 외출을 했는데 올해엔 지금까지 벌써 네 번이나 외출을 했습니다. 지난 토요일의 네 번째 외출은 사전투표를 위해서였습니다. 90평생 나라의 선거에는 한 번 빠지지 않고 투표했습니다. 아마 이번 선거는 내 생애 마지막 선거가 될 것 같아 아직 휠체어에 의지하는 몸이지만 기어코 참가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거 때마다 갔던 낯익은 투표장이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같은 초등학교 2층 교실로 바뀌었습니다. 한참 궁리 끝에 평생 처음인 사전투표를 하기로 했습니다. 사전투표를 하는 주민센터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있고 예년에 경험한 투표일의 혼잡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틀 동안의 사전투표 마지막 날, 두 딸아이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서 300미터 쯤 떨어진 주민센터로 갔습니다. 점심시간 전인데도 건물 밖 도로 위까지 투표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바람이 약간 쌀쌀했지만 휠체어에 앉은 채 기다렸습니다. 투표는 빨리 진행되어 아래층에서 손 소독을 한 뒤 비닐장갑을 끼고 엘리베이터로 3층 투표소로 올라갔습니다. 언론 보도로 알고는 있었지만 비례대표 투표용지의 길이에 당황하며 비닐장갑을 낀 어색한 손으로 투표를 마쳤습니다. 이웃 행정구에 살고 있는 딸아이 하나도 투표할 수 있어 편리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은 3개월에 한 번씩 받는 건강검진 날이었습니다. 아침을 결식하고 셋째 딸 차로 서둘러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더니 주차장이 평소보다 훨씬 한산했습니다. 하루 외래환자 수가 만 명 정도라고 들었는데, 병원 로비도 평소처럼 붐비지는 않았습니다. 주차장 입구부터 본관 현관까지 코로나19 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직원들이 길게 줄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외래환자 수는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혼잡해졌습니다.  

주치의가 처방한 3개월 치 약을 병원 약국에서 받아 동네 식당에 온 것은 2시 넘어서였습니다. 식당까지 오는 도중 차 안에서 올해 처음으로 벌써 일부 지기 시작한 벚꽃 구경을 했습니다. TV에서는 많이 보았지만 금년에는 코로나19 소동으로 꽃구경 외출은 삼가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가 강조되는 요즘이지만, 원래 외출을 많이 하지 않는 제 사생활에 코로나19 소동은 큰 변화나 불편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다만 뉴스를 보는 시간이 좀 길어진 것뿐입니다. 신문 정치기사는 대충 훑어보는 대신 스포츠 기사와 부고기사, 문화면을 많이 찾습니다. 요즘은 좋아하는 골프를 비롯해 많은 경기가 취소되어 스포츠 기사에도 종전 같은 흥미는 잃었습니다.

지난 주초 신문 부고란을 보다가 친구 이도형(李度珩·전 ‘한국논단’ 대표) 씨의 별세 사실을 알았습니다. 2단짜리 기사를 읽으며 크게 슬퍼했습니다. 1933년생이니 올해 87세인데, 제가 외신사에서 기자로 일할 때부터 오랜 친지였습니다. 국방부 출입기자였고 군 관계 인사들 사이에 친구가 많은 그에게서 기사 취재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가 신문기자를 퇴직한 뒤에도 우리는 계속 두터운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제 몸이 불편해 외출을 못 하고 한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던 지난해 여름에 제가 쓴 글을 읽고 전화를 걸어와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제 건강을 염려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 형은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는데 평소 건강했던 그인지라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 당시 요양 차 시골에 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와의 오랜 우정을 회상할 때 특히 생각나는 것이 1976년 8월에 있었던 소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입니다. 북한군 경비병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작업 중인 미군 2명을 도끼로 살해해 한반도가 심각한 긴장상태에 빠진 사건입니다. 거의 연일 판문점에서 양쪽 고위 당국자의 비밀 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일반 판문점 군사회담과 달리 언론매체의 취재를 일절 허락하지 않고 공식 발표문도 없었습니다.

이 긴박한 시기에, 이 형은 비밀 소식통을 통해 취재는 했으나 당시의 엄격한 군사정권 시절에 국내 신문에는 도저히 보도할 수 없는 특종을 비밀리에 저에게 전달하여, 몇 차례 정부와 미군 관계자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형은 그의 소식통의 정보가 절대 정확하다며 저를 믿게 했고, 저는 그를 신뢰하여 이 특종 기사들을 본사로 송고했습니다. 본사도 저의 말만 믿고 일절 경위를 묻지 않고 이 기사들을 전 세계에 송신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이례적으로 사과문을 보내와 미군을 달래고 일촉즉발(一觸卽發)의 한반도 위기가 끝나고 나서야 이 형은 비로소 자기 소식통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신문사 양해를 얻은 행동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그 당시의 긴박한 분위기 속에 용감하게 자기가 취재한 특종들을 아무 대가 없이 전 세계에 알린 고인의 용기와 우정을 저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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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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