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같은 만년필 [박종진]



www.freecolumn.co.kr

손가락 같은 만년필

2020.03.11

제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딱 한 개를 고르자면 어떤 것이죠?”입니다. 참 어렵고 곤란한 질문입니다. 부모가 자식 여럿을 생각하는 마음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고 하는데 제 심정(心情) 꼭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만년필들.

<나를 닮은 파커51>

스스로 생각할 때 저랑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제 별명을 “파카51”로 정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파커51의 전체적인 모습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우선 외형은 유선형으로 쿠바 산(産) 시거를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절반 정도가 뚜껑, 나머지 절반은 플라스틱. 보통 요렇게 생겼습니다. 뚜껑은 은장도처럼 그냥 당겨 빼면 되는데 펜촉은 전축 바늘만큼 살짝 나와 있습니다. 당연히 펜촉이 아주 조금만 나와 있어 잉크가 잘 마르지 않고요. 나중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좋아했고, 실제로 독일 항복 문서에 장군은 파커51로 서명한 후 파커51 두 자루로 V를 만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귀여운 펠리칸100>

펠리칸100은 1837년 설립되어 약 100년 동안 그림 그리는 화구(畫具)류, 만년필 잉크 등을 만들던 독일 펠리칸사(社)가 1929년에 내놓은 만년필입니다. 이 만년필은 엄지와 검지를 집게처럼 벌려 잡으면 딱 들어갈 만큼 귀엽고 앙증맞지만, 성능은 당차게도 큰 덩치를 자랑하는 어떤 만년필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잘 때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만년필입니다.

<가장 화려한 검은색 몽블랑149>

독일 만년필이지만 몽블랑149는 팬텀을 연상시킵니다. 십여 년 전 도쿄 긴자(銀座) 밤거리에서 처음 세워져 있는 롤스로이스 팬텀을 봤는데, 번개같이 몽블랑 149가 떠올랐습니다. 검은 유리알처럼 번쩍이는 광택에 찬란한 금빛 장식, 좌중(座中)을 압도하는 커다란 덩치. 둘은 꼭 닮았습니다.

<팔방미인 펠리칸 M800>

보통크기 또는 작은 만년필만을 고집하던 펠리칸사(社)에서 처음 내놓은 대형기로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스펙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인간성도 좋은데 공부는 물론 운동도 잘하는 데다가 인물까지 받쳐주는 경우입니다. 몇 개월 있다가 써도 바로 써지는 좋은 밀폐, 28그람의 무게가 살짝 무겁게 느껴지지만 잡는 순간 그 무게를 잊게 하는 밸런스를 갖고 있습니다.

<파이롯트 캡리쓰는 볼펜처럼>

이름 자체가 뚜껑이 없다는 뜻을 갖고 있는 파이롯트 캡리쓰는 볼펜처럼 뒷부분의 꼭지를 누르면 펜촉이 쏘옥 나오는 만년필입니다. 1963년 일본 출생인데 수십 번 고치고 바꾸고 다시 만들면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셔츠에 꽂고 있다 바로 뽑아 바로 글씨를 쓸 수 있는 마치 권총을 빨리 뽑는 서부 총잡이 같다고 할까요. 바쁜 현대 생활에 꼭 필요한 만년필입니다.

<영롱한 옥색 쉐퍼 라이프 타임>

지금은 그 명성이 많이 떨어진 쉐퍼는 만년필 역사상 그 공헌도를 보면 파커와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년필을 구매하면 보증해주는 제도를 맨 처음 도입했고,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재질 만년필 시대를 연 것까지. 쉐퍼사가 창조한 것은 이밖에도 꽤 많습니다. 그 잃어버린 영광을 어떻게라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면 깨끗한 옥(玉)색의 쉐퍼 라이프 타임 ‘제이드’를 손에 넣으시면 됩니다. 어쩌면 그 옥색이 건강과 행운을 가져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렇다고 옥매트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로지 내 것 파커75>

은(銀) 92.5 퍼센트로 만들어진 은제(銀製) 격자무늬가 새겨진 파커75는 너무 반짝반짝 빛나면 안 됩니다. 많이 만지는 곳은 은빛이 새어 나와도 되지만 나머지 부분 검은색 은 때가 끼어 있어야 합니다. 식기, 반지도 아니니 닦지 마세요. 모직(毛織) 양복 안주머니에 끼워져 있어야 하고 남한테 절대 빌려줘서는 안 되는 만년필입니다. 왜냐면 파커75는 내가 잡는 버릇에 따라 손잡이와 펜촉을 맞출 수 있는 장치가 있어 맞춰 놓으면 남들한테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아픈 손가락이 어느 것이냐 또 물으시면 올해는 “파커51”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왜냐면 올해 제 나이가 51세이기 때문입니다.

.

 파커51 만년필

.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