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바쁘니 과정은 빼고 결론만...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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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 바쁘니 과정은 빼고 결론만...

2020.01.16

새 달력으로 바꾼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 달이 지나고 민족의 명절 설도 곧 다가옵니다. 굳이 몇 살까지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기억은 없으나, 요즘 ‘100세 인간’이라는 말이 유행해 ‘이왕이면 100세까지는 살아야지’ 하는 생각 속에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멘토로 존경하고 있는, 올해 100세가 넘는 김형석 교수님이 신년에 관한 글에서 “새해가 온다는 것은 인생의 석양이 다가온다는 신호”라고 좀 서운한 감을 나타내고 이어 “과거가 길어질수록 미래가 짧아지기 때문”이라고 말해, 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초 병고에 시달리다가 입원치료까지 받게 되고 가까스로 설 명절 직전에 퇴원했던 비참한 경험에 비하면, 김 교수 표현대로 ‘인생의 석양’은 다가올지라도, 새해에는 더욱 건강을 회복하여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고 소원하며 해를 넘겼습니다.

비록 ‘인생의 석양’ 길에는 한 걸음 더 다가섰지만, 제 띠 해인 경자(庚子)년 새해엔 기력과 체력이 더욱 회복되어 아이들 걱정을 덜어주고 옛날처럼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가끔 나갈 수 있는 희망의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100세라는 수명도, 몸이 건강해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병석에 자주 눕거나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인공 연명장치 신세를 지는 100세 수명을 저는 바라지 않습니다.

국내외의 정세가 그야말로 복잡다단(複雜多端)하고, 최근에는 중동사태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언론매체를 통해 알고는 있지만 이런 것에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는 별로 없습니다. 이웃 나라에서는 올해 여름에 열리는 그들의 두 번째 올림픽/패럴림픽 준비에 온 국민이 흥분하고 있는 모양이나, 여기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뜻있게 보낼 수 있는가에만 부심(腐心)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앞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많은 정치학자들이 예언하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3개월 뒤에 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정치와 정치기사에 관한 관심을 잃었습니다. 소위 각종 여론조사에도 흥미를 잃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구독하는 일간신문 하나는 그저 관성적(慣性的)으로 받고 있으나, 기사 제목만 훑어보는 게 고작입니다. 간혹 흥미를 느끼는 기사나 글을 돋보기를 사용하여 읽습니다.

한자를 혼용했던 글에 아직도 익숙한 노안(老眼)에는 신문이나 단행본의 한글전용의 작은 글씨를 판독하는 데에 시간과 정력이 무척 소비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비웃고 있지만 독서는 외국어로 된 서적을 많이 이용합니다. 잠 안 올 때에 대비해 침대 이불 속에는 항상 서너 권의 책을 넣어두고 있습니다. 그중 한 권은 언제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일본 문고판 소책자입니다.

실용주의를 추구하던 미국 사회에서 ‘Stupid, it's the outcome(result) that counts!'(바보야, 중요한 건 결과야!)라는 표현을 많이 쓰던 때 한 미국 통신사에서 일했습니다. 과정(過程)에 충실하려던 제가 불만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저는 그 결과만을 쫓고 살고 있습니다. 과정이나 도중의 디테일(detail)에까지 관심을 가질 물리적 여유가 없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미국의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받았다는 결과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영화를 볼 흥미나 관심은 없습니다. 영화관에 마지막으로 간 것이 10여 년 전입니다.

옛날엔 미국 LPGA에서 한국 여자 골퍼가 선두를 달리는 마지막 라운드의 경기는 컴퓨터나 TV를 통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자세히 관전했습니다. 선수들의 기록도 잘 외우고 있었습니다. 박세리나 박인비 선수의 전성시대에는 한국 선수들의 개인기록이나 신상에 관한 뉴스에 현역기자 때처럼 민감했습니다. 지금은 결과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경기 과정에까지 매달리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야구나 축구 TV 중계도 보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예전처럼 흥미가 없고 지루함을 느낍니다. 승부가 간단히 끝나는 씨름은 가끔 봅니다. 그럼 하루 24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외출도 마음대로 못 하는 몸 상태로 지루하지 않은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24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오랜 습관이 된 규칙적 생활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수면시간은 7시간으로 정하고, 낮잠은 자지 않습니다. 가끔 침대에서 쉴 때 잠깐 잠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낮잠을 자지는 않습니다. 외출하지 못하는 시간을 실내운동이나 클래식음악 감상 등으로 때웁니다. 원래 프랑스에서 시작된 ‘Number Place'란 숫자놀이를 한 일본 기업이 확대 개발한 ‘Sudoku'(數獨)를 컴퓨터 Pad로 즐기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지금처럼 널리 보급되기 전 우연히 알게 된 이 숫자놀이는 중독성이 없이 뇌할동을 돕는 게임으로 20년 가까이 즐기고 있습니다.

실내 사이클링 운동기구와 보행보조기 등을 아이들이 구입해 주어 애용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두세 번 컴퓨터 작업도 합니다. 한 번에 1시간 이내로 제한하여, 글쓰기, 메일, 외국신문 읽기 등을 즐깁니다. 컴퓨터와 구식 휴대폰이 외부와의 유일한 매개체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습니다. 다만 큰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으면 하는 희망은 늘 갖고 있습니다. 이 나이까지 잘 살아왔으니 몹쓸 치매만은 피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뇌운동 등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새해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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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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