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 [안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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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시간

2019.12.31

승려 틱낫한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져다 준 쿠키 하나를 먹는 데 30~45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쿠키 한 입 베어 물고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스테파니 로젠블룸의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를 읽다가, 그 구절에서 한동안 눈길이 멈췄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바라보는 하늘이, 그의 시선이 닿는 풍경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틱낫한은 올해 94세, 이제 곧 95세가 되는 베트남의 살아있는 붓다입니다. 스님은 지금도 시를 쓰고, 뜰을 가꾸고, 가르침과 수행의 순례를 펼칩니다. ‘고통 없이 성장할 수 없다, 고통이 없다면 마땅히 누려야 할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없다, 고통으로부터 달아나지 말고 그것을 끌어안고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라, 붓다는 고통은 고귀한 진리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틱낫한이 생각한 평화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어린 시절 쿠키 하나를 먹으며 하늘을 바라보던’, ‘그런 다음 개를 쓰다듬고는 다시 한 입 베어 물고 그렇게 대나무와 숲, 고양이와 개, 꽃과 함께 있는 걸 즐겼다.’는 고백처럼, 그의 혼자만의 시간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입안의 달달함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정신적 평화를 만들고, 온유한 삶에 대한 애정 가득한 생활을 공명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흔히 고독은 피해야 할 대상이며 이것이 지나치면 외로움과 우울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고독이 얼마나 자신에게 더욱 솔직해지고 타인을 향한 연민을 갖게 하는지, 고독이 주는 긍정의 힘을 알 수 있습니다. 고독이 선사하는 사색과 창작과 회복의 가치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특히 자아실현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고립과 명상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도 있습니다.

찰스 다윈은 집 근처 목초지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숲 둘레로 15마일에 달하는 ‘샌드워크’를 조성해 거의 매일 산책을 했고, 특히 고민할 게 많은 날에는 몇 바퀴씩 돌았다고 합니다. 오드리 헵번은 1953년 <<라이프>>와의 인터뷰에서 토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아파트에 혼자 있는 시간을 재충전의 방식이라고 하였고, 사교적인 빌 클린턴도 대통령 시절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잠을 덜 자기까지 했다는 고백도 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은 오늘같이 한 해를 마감하는 날 더욱 소중하게 옵니다. 모두가 모여 기쁘게 보내는 시간도 좋겠지만 혼자라면 또는 혼자 있어야 한다면 이 고독을 사뿐히 즐겨볼 것을 권합니다. 고독은 물질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물질이 행복을 만들지만, 그 행복은 익숙해지면 빠르게 전형적인 행복 수준으로 바뀌어버리는, ‘쾌락적응’의 심리적 현상을 띱니다. 하지만 경험은 타인과 비교될 수 없는 고유의 것이며, 그 경험으로 인한 행복은 한계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환난을 자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쩌면 고독을 환난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환난을 지켜내는 인내심이 단련된 인격을 만들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혹 지금 지쳐있는 내 영혼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홀로 고독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고독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있음을 상기해보길 바랍니다.

며칠 전 지인이 보낸 문자에는, 회사 뒷마당 대봉감나무의 감을 따먹었다고. 그런데 깊어가는 겨울, 추위 속에 얼었다 녹았다, 감이 꽃 같더라고, 그 맛이 평생 처음 느낀 맛이라고 전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감의 풍경, 작은 차 스푼으로 받쳐 들었을 주홍빛 고독을 떠올려보았습니다. 틱낫한의 쿠키처럼. 그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분명 혼자만의 시간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정경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소중해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잠시만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음미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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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안진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색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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