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고덕강일 아파트


[한은화의 생활건축] 살고 싶은 고덕강일 아파트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


    이런 아파트가 있다면 어떨까. 평면 타입이 26가지다. 내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집을 고를 수 있다. 전망이 좋은 고층형 타워도 있고, 마당이 있는 저층형, 스튜디오가 있거나 세대를 분리할 수 있는 복층형도 있다. 집마다 향도 다양하고 테라스 크기도 다르다. 모두 똑같아서 동·호수로만 집을 구분해야 했던 것과 다르다.




이런 아파트가 실제로 지어진다. 서울의 마지막 공공택지의 마지막 물량, 고덕강일지구 10블록(사진)의 모습이다. SH공사는 최근 현상설계 공모 결과 대림산업·미래와가치·시아플랜건축사무소·전아키텍츠건축사사무소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고덕강일지구 총 14개 블록 중 1·5·10블록의 민간 분양 방식은 남달랐다. 가격 입찰이 아니라 설계 공모전에 당선돼야 땅을 분양받을 수 있다. 건설사는 최상의 팀을 꾸려 공모전에 참가해야 했다. 593가구를 짓는 10블록(3만5321㎡)의 경쟁률은 11대 1이었다.

 

[사진 전아키텍츠사무소]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공사비가 더 든다. 전성은 전아키텍츠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공사비 걱정도 있었지만, 컨소시엄 내에서 새로운 아파트 유형을 제시해야 당선될 수 있다고 판단해 전력투구했다”며 “안이 획기적이다 보니 건설사 주택팀이 아닌 일반건축팀에서 견적을 냈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도시를 생각했다. 아파트 단지는 크지만, 주변과 단절되어 있다. 도시가 변하더라도 대응하기 어렵다. 10블록은 주변과 연결되려 애썼다. 단지 가운데 서쪽의 공원과 연결되는 숲길을 만들고, 판상형 동이 장벽처럼 길가에 서지 않도록 저층 건물을 앞세우고, 중층형 건물은 뒤로 물리고, 가구 수를 채우기 위해 일부 고층형을 만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다양한 공유 시설을 둬서 취향껏 들렀다 갈 수 있게도 했다. 이웃을 계속 만나게 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시대다. 고덕강일이 새로운 아파트 시대를 열었으면 한다. 아파트가 달라져야 우리 삶도 바뀔 수 있다.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 중앙일보




규제 하나 풀었더니…아파트단지에 마당·골목길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서울 고덕강일지구의 파격실험

예전과 달리 동간거리 탄력 적용

저층·고층 섞어 지으며 공간활용

택지공급 때도 설계안 보고 뽑아



2019.06.23 보도

     “기존 아파트의 유형을 들고 오면 떨어집니다.”


서울 강동구 '고덕강일지구'에서 획 아파트 설계안을 낸 건설사에게 택지를 분양하는 최초의 설계 공모전이 열렸다. 제일건설과 운생동건축사사무소, 와이오투도시건축연구소가 협업한 1블록 당선작의 모습.[사진 운생동건축사사무소]


이런 으름장(?)과 함께 시작한 아파트 설계 공모전이 있다. 21일 당선작 발표 결과, 반세기 넘는 우리 아파트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안이 나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민간건설사에 공급하는 서울의 마지막 공공택지, 고덕강일지구 1블록ㆍ5블록을 분양받고자 국내 건설사가 치열하게 경합을 펼친 결과다.  



 

지금까지 경제성을 앞세우며 엇비슷한 아파트만 지어왔던 건설사가 왜 이런 실험판에 뛰어들었을까.  

 

택지 공급 방식이 남달랐다. 통상 SH공사나 LH가 공공택지를 민간에 분양할 때 가격입찰을 붙인다. 고덕강일지구의 경우 가격이 아니라, 설계안을 보고 뽑았다. 건축가와 협업해 참신한 아파트 설계안을 제출한 건설사에 택지를 공급하기로 한 것이다. 

 

1블록(대지면적 4만8434㎡) 793가구, 5블록(4만8230㎡) 809가구로 건설업계에 따르면 각각의 분양가가 1조원에 가까운 프로젝트다. 서울의 마지막 공공택지라는 것도 군침 도는 조건이었다.  

 

고덕강일지구의 모습. 3개 지구 총 14개 블록 규모로, 1만1560가구의 공동주택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 중 1블록과 5블록의 설계공모전이 열렸다. [사진 SH공사]


공모전을 공고하면서 심사위원 7명의 명단을 미리 공개했다. 공모전 심사 직전에 심사위원을 공개하던 기존 공모전 방식과 달랐다. 실력 있는 건축가와 아파트 관련 전문가로 심사위원단을 구성했다.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김인철 건축가는 “심사위원 면면을 보고 새로운 아파트 안이 아니면 승산이 없다고 건설사들이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건설사들은 참신한 설계안을 제안할 건축가를 발 벗고 찾기 시작했다. “‘건축가 옆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릴 정도로 건설사들이 건축가가 열심히 설계하도록 내버려 뒀다”고 공모전에 참가한 건축가들이 입모았다.  



 

공모전 결과 1블록은 제일건설과 운생동건축사사무소·와이오투도시건축연구소가 협업한 ‘5개의 작은 마을 공동체’가 뽑혔다. 5블록은 현대건설ㆍ계룡건설산업과 종합건축사사무소건원ㆍEMA건축사사무소가 협업한 ‘공동의 거실’이 선정됐다.  

 

당선작을 포함한 응모작을 살펴봤다. 어떻게 아파트가 다를 수 있는지 기발한 해법들이 담겨 있다. 건설사도 인정한, 조만간 실제로 지어질 아파트의 풍경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왜 똑같은 높이의 아파트 동이 쭉 서 있어야 할까

 

1블록 당선작 ‘5개의 작은 마을 공동체'의 모습. [사진 운생동건축사사무소]


한 단지를 5개의 블록으로 나눠 길에 면한 저층부는 5층 규모로 설계했다. [사진 운생동건축사사무소]



 

건축법상 ‘인동거리’ 규제가 만든 풍경이다. 물론 일조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너무 과한 규제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두 동이 서 있을 때 무조건 높은 동을 기준으로 ‘높이×0.8’ 만큼의 거리를 떼야 한다. 높낮이가 다양한 아파트를 배치하려 해도, 고층 기준으로 간격을 벌려야 하니 결국 같은 높이의 아파트를 쭉 나열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배치가 됐다.     

 

고덕강일지구의 경우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해 인동거리 규제를 완화했다. 남쪽 동의 높이를 기준으로 ‘높이×0.8’의 거리를 두게 했다. 이를테면 남쪽에 10m 높이의 저층 건물을 두고, 북쪽에 30m 높이의 건물을 지을 때 법대로라면 고층 기준으로 두 동 사이를 24m를 떼야 한다. 하지만 완화된 조건을 적용하면 8m만 떼면 된다. 일조권은 확보하면서 다양한 높이의 건물을 배치해도 면적 손해를 보지 않게 한 것이다.  

 

고덕강일지구 5블록 당선작 ‘공동의 거실’ 조감도. 현대건설ㆍ계룡건설산업과 종합건축사사무소건원, EMA건축사사무소가 협업했다.[사진 EMA건축사사무소]


휴먼스케일을 살린, 6층 규모의 건물로 둘러싸인 마당의 모습. [사진 EMA건축사사무소]


6층 규모의 저층부와 최고 29층, 4가지 타입의 고층부를 혼합해 용적률을 채운 '공동의 거실'의 모습. [사진 EMA건축사사무소]




당선작 모두 휴먼 스케일이 살아 있는 저층부와 용적률을 채우기 위한 고층부가 적절히 조화되는 안을 선보였다. 1블록(‘5개의 작은 마을 공동체’)의 경우 37%가 5층 규모의 저층형 아파트다. 5블록(‘공동의 거실’)의 저층부는 6층, 고층부는 최고 29층으로 지어진다. 5블록 당선자인 이은경 건축가(EMA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삭막한 아파트 풍경의 대안으로 저층부에 마당과 길이 있고 동네 커뮤니티가 살아 있는 단지를 설계했다”고 말했다.  

 

단지를 쪼개고 1층을 살려야 커뮤니티가 생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도심복합공간 '사운즈 한남'의 모습. 건물을 쪼개 지어 골목길과 마당을 살렸다. [사진 사운즈 한남]


조수용 카카오 공동대표가 세운 디자인·브랜딩 회사 JOH가 지난해 4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오픈한 도심복합공간 ‘사운즈 한남’은 요즘 세대가 원하는 공간 문법을 보여준다. 1983㎡(600평) 규모의 대지에 큰 건물 한 채를 짓지 않고 5동으로 쪼개 지었다. 건물 사이사이 길과 조그만 마당이 있다. 레지던스ㆍ오피스ㆍ상점이 섞여 있다. 마당에 면한 가게마다 야외 테이블을 둔 덕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앉아 있는 모습을 오가며 볼 수 있다. 유럽의 작은 마을의 광장 같은 분위기다.  

 

고덕강일지구로 돌아와 보자. 1블록 당선자인 장윤규 건축가(운생동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는 “아파트 모델하우스에만 가봐도 알 수 있듯, 지금까지 아파트는 단위세대 평면에만 집중하고 외부 공간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며 “단지를 5개로 나누고 집 밖으로 다양한 생활이 연장될 수 있게 디자인했다”고 덧붙였다. 

 

 

10명의 건축가가 8개의 동네로 설계한 5블록 3등작 '중간도시'의 모습.[사진 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중간도시'에는 20개의 마당과 50개의 길이 나 있다. [사진 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아쉽게 당선되진 못했으나, 5블록 3등작의 제안도 흥미롭다. 프로젝트명은 ‘중간도시’로 금호산업과 10명의 건축가가 협업해 한 단지 안에 8개의 동네가 들어서게 디자인했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김용미 건축가(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중간도시는 소필지와 단지형 아파트의 중간이라는 의미”라며 “아파트도 있고 저층 건물도 있고 건물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어린이와 키 큰 사람이 손 붙잡고 같이 살아가는 도시를 구상했다”고 전했다.    

 

다양한 평면, 내 삶에 맞는 집을 고를 수 있다  

 

5블록 당선작은 평면 타입만 20개가 넘는다.[사진 EMA건축사사무소]




두 블록 모두 전용 84㎡, 101㎡로 구성됐다. 그런데 평형대 별로 단순화하고 표준화한 평면은 볼 수 없다. 5블록 당선작의 경우 평면 유형이 20가지가 넘는다. 

 

생애 주기형으로 평면을 제안해 눈길을 끈다. 신혼부부를 위한 ‘홈 아틀리에형’, 영유아가 있는 가족을 위한 ‘가족생활 중심형’, 자녀독립 부부를 위한 ‘취미생활 중심형’ 등이다.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1세대 2가구 ‘세대 분리형’, 창업자의 주택 ‘소호형’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김정임 건축가(서로아키텍츠 대표)는 “공동주택이어도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아파트가 바뀌어야 한다는데 심사위원 의견이 모였다”고 말했다.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공동주택 단지 '넥서스 월드'의 모습. 미국 건축가 스티븐 홀이 설계한 동이다.[사진 스티븐 홀 아키텍츠]


 

'넥서스 월드'에서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가 설계한 동의 모습.[사진 OMA]



 

해외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아파트 실험을 해왔다. 고밀도의 공동주택은 도심에서 꼭 필요하지만 획일적이지 않도록,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의 경우 후쿠오카에 1991년 준공한 ‘넥서스 월드’가 대표적이다. 250가구가 사는 공동주택을 짓는데 렘 콜하스, 스티븐 홀 등을 포함해 총 6명의 건축가에게 각각의 개성을 살린, 새로운 타입의 주택을 짓게 한 프로젝트다. 

 

이번 공모전의 심사위원이었던 김상길 서울건축포럼 의장(에이텍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은 “이런 새로운 시도가 고덕강일지구에서 멈추지 않고 공공이나 민간에서 제시하는 아파트 단지에도 퍼져 ‘폐쇄적인 도시의 섬’ ‘획일적인 아파트’라는 오명에서 한국의 아파트가 벗어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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