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안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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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2019.12.04

만만했던 종이에 손끝을 베였습니다. 날카로운 쓰라림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늘 가까이에서 기꺼이 제 몸을 내어주던 종이라, 맘대로 해도 되는 ‘내 거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쉽게 보지 말라며 경고를 줍니다. 생채기로 생긴 아릿한 통증이 오랫동안 눈썹 끝에 매달립니다. ‘너 참 차갑다.’ 사실 제 머릿속에 종이는 따듯함이었는데, 서운함도 있지만 이따금씩 일어나는 종이의 반기(叛旗)는 귀하게 여겨 달라는 충고일 것입니다.

종이를 참 좋아합니다. 무언가 끼적이고 싶은 잘생긴 백지의 매끈함, 채색할 때 사용하는 순지의 유연함이 좋고, 먹을 깊게 받아들이는 화선지는 아련합니다. 앙리 마티스는 노년에 관절염으로 정교한 작업이 어렵게 되자, 붓 대신 가위를 들어 페이퍼 커팅(paper cutting) 작업을 했는데, 그 사각거림이 얼마나 자유롭고 유쾌했을까 싶습니다. 아트북의 명장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은 책을 만들 때 알맞은 향기를 지닌 종이를 고르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데, 그 기분을 알 것만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 있어 종이는 집처럼 아늑하게 곁에 있어 왔습니다. 특히 어린시절 추운 겨울날에는 온돌방 따듯한 종이 장판 바닥에 볼을 갖다 대고 엎드려 숙제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눈 버린다’며 야단하시지만 그렇게 글을 쓰면 글씨마저 나긋나긋 부드러워졌고, 스르르 잠이 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쇄된 종이 인형을 잘라 옷 입히기 소꿉놀이를 했고, 종이의 선택에 심혈을 기울이던 딱지치기까지, 종이에 얽힌 추억에는 따스한 미소가 번집니다.

오래전부터 종이는 글을 쓰는 문필용뿐 아니라 복주머니, 실첩, 반짇고리, 그릇 등 우리네 생활의 필수품이었고 예술과 놀이의 도구였습니다. 더욱이 문, 벽, 천정 그리고 방바닥에까지 종이를 사용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슷한 문화권이어도 중국은 입식 생활을 해왔고 일본은 습한 섬나라로 다다미를 놓았으니 바닥마저 종이를 사용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종이문화는 자랑할 만한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알려진 대로 고구려의 뛰어난 제지기술은 서쪽으로는 고선지 장군에 의해 실크로드를 따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에 전해졌고, 동쪽으로는 승려 담징이 일본에 그 기술을 전하는 등 전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중국의 경우 색종이는 종이를 뜬 후 염색하여 사용하는 방식이었다면, 우리나라는 종이 원료 자체에 물을 들여 한 번에 색종이를 뜨고, ‘봉투’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한 세계 최초의 민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종이는 종교 의례용으로도 활용되는데, 얼마 전 강경에 위치한 나바위 성당에서 독특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나바위 성당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 서품 후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 상륙하신 장소로 성당 외관도 아름답지만, 대부분의 성당 창문이 스테인드글라스로 화려하게 되어있는데 비해 이곳은 색한지와 먹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된 성화(聖畵) 창문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성당 외부에서는 한지로 만든 성화의 뒷면이 보이게 되어 담담하게 외관과 조화를 이루고, 내부에서는 성화의 앞면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한지의 부드러움이 곱고 정다웠습니다.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렇게 한지를 이용한 성화가 우리의 신앙체계를 표현하는 양식으로 귀하게 쓰였을 것이고 또한 옛 전통의 방식을 오늘날 잘 활용하고 있는 사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포근해졌습니다. 칼바람으로 추운 겨울날 불현듯 따듯한 종이를 생각해봤습니다. 친환경적이고 감성적인 소재.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가는 시대에 종이의 소중함과 귀함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음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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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안진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색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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