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를 부르는 세상 [박상도]


www.freecolumn.co.kr

조커를 부르는 세상

2019.10.28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가 주연을 한 영화 ‘조커(Joker)’의 누적 관객수가 500만이 넘었습니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 중 아서 플랙(조커)을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기에 압도당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배우의 명연기뿐만 아니라 소재 역시 특이했습니다. 영화 배트맨에서 악당으로 등장하는 조커가 주인공이자 영화 제목이니 그 자체로 주목을 끌 만했습니다. 악당이 주인공이며 그의 서사시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면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할리우드 공식과는 꽤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악당이 잘 먹고 잘사는 결말의 영화야 그동안 종종 있었지만 악당의 스토리를 보여주고 관객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어 그가 저지른 범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장치가 있는 영화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한술 더 떠서, 마지막 장면에 조커가 죗값을 치르기는커녕 폭도들의 우상으로 등극하면서 끝이 납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상업 영화입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시장에 순응한다는 뜻이며, 관객들의 취향에 맞게 영화를 제작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 내에서만 팔려고 제작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할리우드 영화는 대사를 보지 않고도 이해가 가능한데, 이는 세계시장을 고려해서 표정과 연기 그리고 제스처 등등을 통해 영화의 줄거리를 뒷받침해주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입니다. 그러한 할리우드가 ‘조커’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이 이야기가 팔릴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배트맨 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저(Heath Ledger)가 조커 연기의 신기원을 열었기 때문에 조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제는 조커에 열광할 만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대립이 임계치를 넘고 있다는 것을 영화 제작자가 간파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할리우드 영화로서는 매우 드물게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됩니다.

만약에 이 영화가 20년 전쯤 세상에 나왔다면 지금처럼 관심을 끌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도 세상은 불공정했고 빈부격차가 존재했습니다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적어도 ‘정의가 항상 이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이제는 없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배트맨이 열 번 등장해서 허구에 불과한 악당 백 명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조커 한 명이 실체적 악인을 처형하는 장면에 열광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광대 분장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던 주인공 아서 플랙이 연약한 여성을 희롱하던 웨인 엔터테인먼트에 다니는 엘리트 회사원들과 시비가 붙고 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총으로 이들을 살해하게 되는데, 부유한 웨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있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광대분장을 하며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조커의 살인에 묘한 정당성이 부여되는 순간입니다.

빈부의 격차는 늘 있어왔습니다만, 지금처럼 고착화되고 비윤리적으로 돈을 버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자신의 저서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에서 불평등이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를 자본주의 자체의 메커니즘에서 찾고, 브레이크 없는 자유경쟁이 불러오는 부작용들을 풀어가기 위해 국가가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어느 정부도 그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습니다.

8년여 전에 "We are the 99 percent”라고 외치며 뉴욕의 월가를 뒤엎었던 시위 이후, 세계는 더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불평등은 더 깊어지고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산층은 붕괴되었고 계층의 추락을 당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더 그악스러워졌습니다.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고 하고 계층의 재생산을 위해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돈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정경심 교수의 경우가 만연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입니다. 다음은 교수 자녀의 논문 공저 사례를 보도한 MBC 뉴스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자녀와 공동으로 논문을 썼다는 교수들의 이야기가 참으로 가관입니다.

"부모가 자기가 주어진 조건 하에서 아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성장할지를 고민하는 거고, 저도 그런 수준의 것이지, 이게 불법적인 거라든지 비윤리적인 그런 건 아무것도 없는데…"  - 조OO 연세대 교수(아들과 공동저자)

"엄마 찬스, 아빠 찬스겠죠. 어쨌든 간에 기회 불평등이란 건 사실이지만, 이들이 도덕적으로 잘못한 거냐? 그건 아닌 거죠. 기회가 있고 기회를 이용할 수 있어서 이용한 거고. 누구라도 할 수 있었으면 했겠죠." - 황OO 경희대 교수(동료교수 딸과 공동저자)

이처럼 젊은이들의 운동장은 부모의 소득과 지위에 따라 엄청나게 기울어져 있고 어떤 곳엔 높은 담이 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평등과 불법, 탈법을 감시하고 계도해야 할 권력기관의 모습은 더 가관입니다. 현 정부 장관 18명 중 12명이 자녀를 자사고나 외고에 보냈고 일부는 유학을 보냈다고 합니다. 앞선 정부 역시 이 비율은 비슷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사고, 외고, 국제고를 없애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요? 수시제도를 없애지 않는 한 기울어진 운동장이 바로잡히지 않을 겁니다. 지난 9월 23일 자 칼럼에서 필자가 수시(隨時)를 없애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 글에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정말 대찬성입니다. 난 고등학교에서 아이들 지도했던 사람입니다. 학력고사 때처럼 공정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수시입학제도는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을 위한 별개의 등용문입니다.”

며칠 전 대통령이 수시를 줄이고 정시의 비중을 높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나,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수시를 아예 없앨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수시를 넘어가면 편입이 있고, 학부를 졸업하면 의전원, 로스쿨이 있습니다. 산 넘어 산인데 흙수저들에겐 이 산이 에베레스트만큼 높게 느껴질 것이고 금수저들에겐 동네 뒷동산 정도로밖에 안 여겨질 겁니다. 왜 우리 사회는 공정했던 학력고사와 사법시험을 다 내팽개치고 편법이 난무한 복잡한 제도를 힘들게 가져왔을까요?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 제도들의 도입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면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변질이 됐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제도의 원조 격인 미국도 그다지 정의롭게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는 걸로 보면, 필자는 제도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10월 22일 연합뉴스에 열흘을 굶다 마트에서 빵을 훔친 30대 젊은이의 이야기가 보도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혈혈단신인 이 젊은이는 일을 하다 넘어져 허리를 다쳐 장애 6급 판정을 받은 후로 더는 일을 할 수 없었답니다. 회사를 나와 카드 대출로 생활을 하다 더는 대출을 받지 못하자 그가 생활하던 고시텔에 누워서 열흘을 굶으며 버티다, 배고픔에 양심과 죄책감을 잃어버리고 마트 앞에서 소화기로 출입문을 깨고 빵 20여 개, 냉동 피자 2판, 짜장 컵라면 5개 등을 주워 담아 고시텔로 돌아가서 허겁지겁 먹었다고 합니다. 경찰서에 끌려온 그는 상담을 통해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오늘도, 여야 모두 아전인수 격으로 국민의 뜻을 따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국민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필자의 눈에는 조커로 변해가는 국민이 보이는데, 왜 그들은 그걸 보지 못하는 걸까요? 영화 조커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는데 현실이 영화보다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우리 사회가 혹시 지금 조커를 부르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