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앞에서 꽃을 그리워하다 [안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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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앞에서 꽃을 그리워하다

201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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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진의 作, 꽃의 시간, 90.5x72.7cm, 장지에 석채 혼합재료, 2019

초가을 햇살이 아름다운 날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어느덧 마흔네 번째 개인전이 됩니다. 작품의 명제 ‘꽃의 시간’이란 제게 순수의 시간을 말합니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시간이 아니라 꽃을 마주하는 순간 만나는 오롯한 서정의 시간입니다. 꽃을 바라보는 동안 내면에 흐르는 아름다운 정서, 선한 나를 마주하게 되는 감성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꽃의 시간’이란 작품 제목을 처음 사용하게 되었던 것은 2012년입니다. 깊은 슬럼프에 빠졌던 시기였습니다. 슬럼프가 있을때 마다 늘 찾던 곳이 꽃과 나무가 있는 자연이었는데, 그곳에서 말라비틀어진 꽃대, 흩어진 꽃잎들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것들은 화석(化石)이 되어가고 있고 그저 복구될 수 없는 생명의 자취고 흔적으로 존재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곧 자연은 소생하고 순환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그라지던 시간의 무덤에서 돌아와 다시 생환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 어쩌면 죽은 것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기억 속에서만 사멸되었을 뿐. 저는 시간의 저편을 건너간 것들에게 생명의 빛깔을 입히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위축되었던 저를 살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 화폭에는 마른 꽃잎들이 자리했고, 그것을 소생하는 신비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자연을 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을 통한 삶의 성찰과 사색의 명상적 시공간을 화폭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 무렵 시작된 작품들을 그래서 ‘꽃의 시간’으로 불렀습니다. 꽃의 시간은 그저 위로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꽃과 같은 마음,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시간은 바뀌고 비로소 저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는 또 다른 부제가 함께 했습니다. ‘꽃의 시간, 꽃 앞에서 꽃을 그리워하다’입니다. 이제 꽃을 바라보고 꽃을 대상화하고 꽃에 말을 거는 것을 넘어서, 꽃과의 사귐이 아니라 꽃의 은유가 아니라 그저 꽃 자체가 되고 싶었습니다. 자연과 일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고독하기를 감행합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의 시입니다. 애절한 그의 시구처럼 저도 꽃에 매달려봅니다. 눈꺼풀에 주렁주렁 슬픔을 매달고 한낮의 열기에도 섬뜩해지는 오한을 느끼며, 가슴에 시리게 파고드는 통증을 견뎌봅니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하고, 자연과의 일체 역시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픈 고독의 끝을 통과하고 자유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자연은 저의 모든 감각을 열어주는 제한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 자연 안에서 고귀한 생명력과 존재의 가치를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꽃 앞에서 꽃을 그리워하며 다시금 꽃의 내면을 깊이 바라봅니다. 보고 있는 동안 저의 시선은 그 꽃처럼 되어가는 기쁨이 만들어집니다. 꽃이 담긴 눈망울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세상을 향한 눈길이 아닐까요. 제 그림 속 꽃들은 이제 날개를 달기 시작합니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훨훨 날아가는 자유의 풍경이 되고자 합니다.


*안진의 초대전 <꽃의 시간-꽃 앞에서 꽃을 그리워하다> 9월 17일~ 10월 27일, 두인갤러리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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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안진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색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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