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사다리

부러진 사다리
김종호 부국장 겸 산업부장기사

     해외 진학반을 둔 어느 고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름방학을 앞둔 학생들은 대학입시에 도움이 될 만한 과제를 찾고 있었다. 진학 지도 선생님은 3~4명이 협동해서 학교 주변의 생태조사를 해 볼 것을 권유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그 정도 과제로 될까' 우려했다. 대학에 합격하려면 뭔가 어렵고 복잡한 실험을 해야한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 많은 선생님이 강력하게 권하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생물시간에 배운 대로 학교 주변에 사는 동식물을 분류했다. 개체 수를 조사하고 생태 지도를 그렸다. 토양 오염 요소도 찾아 주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관찰했다. 6개월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비록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소논문을 완성했다. 과제를 함께 수행한 학생들은 하버드대 등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합격했다.



물론 대학들은 학생들의 미국수능점수와 선행학습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분명한 점은 학생들의 연구과제 소논문을 심사하면서 과제가 얼마나 어려운가보다는 얼마나 독창적인지, 고교생들이 할 수 있는 과제인지, 직접 참여했는지 등을 면밀하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 학생들이 한국의 유명 대학에 지원했다면 합격했을까. 최근 조국 장관 사태로 드러난 국내 대학의 신입생 선발 기준에 따르면 합격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학교 주변 생태조사 정도의 평범한 과제와 고교생 수준의 소논문으로는 명문대의 ‘수준 높은’ 커트라인을 통과하기 힘들다. 의과대학에서 신생아 91명의 피를 뽑아 진행하는 고난도 실험에 참여하고, 그 논문의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정도는 돼야 합격을 기대할 수 있다.



고교생이 대학에서 하는 어려운 실험에 참여하고 논문의 주요 저자로 이름을 올리려면 그런 능력을 가진 부모님이 있어야 한다. 권력자든 부자든 발 넓은 교수든 말이다. 그런 부모가 없는 학생은 있는 학생에게 밀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그렇다.

논문이 연구부정행위 판정을 받아 취소됐으면 그 논문의 주요 저자임을 평가해 학생을 뽑았던 대학은 지금이라도 입학취소 처분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학생에 밀려 입학하지 못했던 지원자를 찾아 사과하고 본인이 원할 경우 추가 입학의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대학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결국 한국에선 공부 잘하는 학생도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어렵다.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개인의 성장만 막힌 게 아니다. 국민 다수를 더 잘 살게 해 줄 ‘경제 성장의 사다리’도 부러졌다.

8월 취업자 수가 1년 전보다 45만2000명 늘어났다고 통계청이 발표했다. 겉만 보면 고용 상황이 좋아진 듯하지만 속은 정반대다. 늘어난 취업자 대부분이 60세 이상 고령자다. 공원의 잡초 뽑기나 전통시장 청소 같은 고령자 대상 1~2개월짜리 공공 일자리를 정부가 대폭 늘렸는데, 그로 인해 전체 취업자 수가 증가한 것이다.



노인 일자리 증가는 생산성 향상이나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안 된다. 반면 국가 경제 성장을 이끌어야 하는 30대, 40대 취업자 수는 23개월째 감소했다. 이들이 갖고 있던 제조업 일자리는 2만4000개나 줄었다.

하지만 집권 세력은 이런 비판에 느긋한 모습이다. 오히려 단기 공공 일자리를 얻게 된 유권자들이 다음 선거에서 집권 여당에 투표할 것으로 기대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대통령은 "고용 상황이 양과 질 모두에서 뚜렷하게 개선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어려움 속에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가 성장하고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려면 제조업 투자가 활발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제조업 투자는 반도체 등 일부 업종에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마저도 해당 기업이 투자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5년 후, 10년 후 국가의 미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는 별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성장을 위한 장기 경제 정책보다 득표를 위한 단기 정책을 우선시하는 모습이다.

경제 성장의 중단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별하는 ‘윤리의 사다리’마저 부러졌다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는 가난한 집 재수생이 부잣집 자녀의 과외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교 재학증명서를 위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서 위조는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불법행위지만 영화를 보는 대부분 관객은 눈감아준다. 반지하 방에서 가족과 어렵게 살아가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녀의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위해 대학 총장의 표창장을 위조했다면 그것을 눈감아 줄 사람은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요즘 그렇지 않은 현실에 깜짝 놀란다. 영화를 너무 감명 깊게 본 나머지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재난 영화를 보고 탈원전 정책을 세웠다는 소문처럼 말이다.

여기엔 여론 조작에 관련된 인터넷 포털의 책임이 크다. 포털이 적극적으로 관여하든 소극적으로 방치하든, 뉴스 댓글과 좋아요 조작, 검색어 순위 조작은 범죄행위를 눈감아주는 사람이 다수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도덕 감정을 무디게 하고 윤리 의식을 약하게 만든다.

부러진 사다리는 어떻게 복원해야 하나.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아 답답할 뿐이다.
조선일보
캐이콘텐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