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동네서만 60년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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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동네서만 60년

2019.09.09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습니다.또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바뀐다’는 말도 있습니다. 전기나 증기기관차가 발명되기도 전인 까마득한 옛날에 이런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던 우리 선인의 혜안(慧眼)에 놀랄 뿐입니다.

AI(인공지능)니 5G(제5세대) 등 자고 나면 새로운 낱말이 생길 정도로 세상이 빨리 바뀌는 요즘, 서울 토박이도 아닌 사람이 도심에 가까운 한동네에서 60년 가까이 살았다고 하면 신기하게 여기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경제에 무관심했으면…’ 하고 동정 어린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같은 번지에서 거주한 것은 아니지만, 한동네 안에서 단 한 번 100여 미터 떨어진 길 건너로 옮겨 계속 그 마을 주민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직장 따라 피란수도 부산에서 서울로 온 제가 셋방과 전셋집 등을 거쳐 두 번째로 내 집을 마련해 이사온 곳이 서대문구 응암동이었습니다. 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장면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으나, 계속된 당파싸움으로 세상이 어수선한 시대였습니다.

원래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던 응암동 일대는 광복 후 서울시로 편입되어 서대문구에 속했으나, 개발이 늦어 1960년대 초엔 아직도 농지가 많이 남아 있는 변두리였습니다. 봄이 되면 벼농사를 준비하는 논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낭만적 풍경이 인구 몇 백만의 대도시 일부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습니다.

이 변두리로 오게 된 것은, 우선 집값이 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노모를 포함해 일곱 명의 대식구가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는 건 월급생활을 하며 큰 저축이 없는 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습니다. 다행히 지인의 소개로 방 네 개와 대지가 넓은 이 집을 적당한 가격에 구한 것은 큰 복이었습니다.

펌프가 달린 우물이 있을 뿐, 처음엔 수도시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덕방 주인이 바로 옆에 서울시청 수도과장이 살고 있다며 넌지시 곧 수도가 개통될 것이라고 시사했습니다. 얼마 후에 정말로 수도가 개통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스는 여전히 공급되지 않아 식사와 난방에 연탄 신세를 졌습니다. 새로 증설한 방 두 개에 연탄가스가 새어 아이들이 고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변두리라 그런지 도시답지 않게 이웃과의 왕래가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담을 같이 하는 제주도에서 온 부부와는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담 하나 사이지만그 집 대문은 골목을 약 50미터 돌아가야 하는 방향에 있어 왕래하기가 퍽 불편하였습니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콘크리트 벽 일부를 헐고 사립문을 만들어 제주도식으로 왕래를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아마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드문 일일 거라며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근처에 군 영관급으로 있다 제대하여 당시 여당인 공화당 중간 간부로 일하는 분의 집을 포함한 세 집이 주말에는 일박 온천여행을 갈 정도로 가족적인 친교를 즐겼습니다. 우리가 길 건너 새 집으로 이사 간 뒤에도 이 관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보다 훨씬 나이 어린 제주에서 온 남편 분은 제일 먼저 돌아가시고, 군에서 제대한 건강했던 분도 시내 술자리에서 과음한 뒤 귀갓길에 도로변에 쓰러진 후 이것이 발단이 되어 오랜 투병 끝에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희들이 동네 안에서 이사를 가게 된 것은 집사람 친구의 딱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시작된 공무원 기강 잡기 운동의 일환으로 ‘1가구 2주택’ 단속이 심할 때, 모 은행 간부로 있던 집사람 친구 남편이 녹번동에 있는 집을 급히 처분해야 할 궁지에 빠졌습니다. 이분은 강남에 고급 빌라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지하실까지 달린 2층 집을 살 여유는 없었는데, 그 은행 간부가 융자까지 알선해 주면서 집을 강제로 팔았습니다. 다행히 먼저 살던 집이 곧 팔려 별 무리 없이 강제 이사는 진행되고 그 은행 간부도 화를 면했습니다.

서대문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은평구에 편입된 후에도 농지에 주택은 많이 들어섰지만 인프라 개발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지하철이 개통되어 교통은 편리해졌지만 변두리라는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 도시 개발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었습니다.

다행히 부산 시대부터 절친했던 친구 세 사람이 동네 가까이 살아 휴일엔 자주 만났습니다. 언론계 인사로 최석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비롯해 동아일보의 권오기 씨(나중에 동아일보 사장,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등이 한동네에 살아 가끔 얼굴을 맞대었습니다. 아쉽게도 이분들 모두가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연합통신을 거쳐 현재 영문 월간지 ‘Diplomacy’ 회장인 임덕규 씨는 저보다 1년 먼저 이곳 주민이 되고, 서울경제신문 사장을 하다 지금은 저와 같이 자유칼럼에서 글을 쓰는 임종건 씨도 같은 녹번동 주민입니다.

지하철이나 차로 20분 정도면 시내 중심부에 갈 수 있게 된 지금은 종합병원과 대학이 네 곳이나 20분 거리에 있고 대형 상가도 생겨 생활환경이 훨씬 좋아졌습니다.다만 재개발 바람이 2년 전 불기 시작하여 15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가 답답하게 전망을 가로막아 옛날의 전원주택지 분위기가 사라져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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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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