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않은 싸움은 희생을 부를 뿐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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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지 않은 싸움은 희생을 부를 뿐

2019.08.01

브렉시트의 진통을 안고 있는 영국에 새 총리 보리스 존슨(55)이 등장했습니다. 유럽연합(EU)과의 브렉시트 합의안이 의회 반대에 부딪혀 퇴진한 테리사 메이에 이어 집권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면서 자동으로 총리 자리를 넘겨받은 것입니다. 존슨은 일찍부터 영국이 EU 안에서 큰 손해를 보고 있다며 탈퇴를 주장해온 보수 우파 인물입니다. 취임 일성으로 오는 10월 말까지 무조건 EU와 결별하겠다고 선언, 유럽은 물론 세계 경제에 상당한 파장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73)은 ‘영국판 트럼프’라는 평을 듣고 있는 존슨의 총리 취임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진작부터 영국이 EU와 헤어져 독자적으로 미국과 거래하는 편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부추겨왔습니다. 주위 평을 들어보면 둘은 여러 가지로 닮은 데가 많습니다. 자국 이익을 앞세우고, 이민 유입에 반대하는 외골수에 거칠고 험한 언사까지 엇비슷합니다. 존슨은 이슬람 전통 복장 부르카를 입은 무슬림 여성을 '은행 강도'로 묘사하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부분적으로는 케냐인 대통령”이라고 비하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America First’를 외치며 무역 전쟁, 국경 봉쇄를 서슴지 않는 미국의 트럼프에 이어, 영국에는 ‘노딜(합의 없는) 브렉시트’도 마다않는 강경파 존슨이 대표선수로 나섰습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65)가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주변국들과 어느 때보다 험악한 관계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소위 ‘아베노믹스’ 효과에 힘입어 총리로서 전례 없는 장수를 누리는 중입니다. 중국에서는 대국굴기(大国崛起)의 꿈을 꾸는 시진핑(習近平, 66)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으로 숱한 국가들을 회유하고 압박하며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도 주석 임기를 철폐하며 전임자들이 금기시해온 장기 집권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비밀경찰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67)이 ‘현대판 차르’로 철권통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무자비한 정적 탄압, 철저한 언론 통제로 비판받지만 그 역시 경제적 성과를 내세워 2000~2008년 4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연임하고 2012~2018년 첫 6년 임기에 이어 두 번째 연임에 들어갔습니다.

원래 세상이 도덕군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건 아닌가 봅니다. 어느 때보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정세 속에서 한결같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이 권력을 장악, 멀리서 가까이서 우리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나라도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웃 일본과 과거사를 빌미로 옥신각신 다툼 중입니다.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정리했던 것까지 뒤집어가며 분쟁을 이어갑니다. 요즘은 마치 항일 독립운동이 재연되는 분위기입니다.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살고 있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아직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것일까요. 지금 우리 정부의 지향점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능한 장수는 승리의 확신이 서지 않으면 도발하지 않고, 유능한 사냥꾼은 목표가 확실치 않으면 화살을 날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제든 안보든 준비되지 않은 싸움엔 애먼 희생만 따를 뿐입니다.

일본은 기어이 우리 경제의 급소라고 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의 핵심 소재들에 대해 수출 규제라는 보복을 가해왔습니다. 첨단 소재산업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일본의 이 같은 제재는 앞으로 더욱 확대되고 심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다급해진 정부가 대내외 전략을 총동원, 숨 가쁘게 대응책을 꺼내 놓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우선 국내 기업들을 불러 모아 주요 소재 수입처의 다변화와 국내 생산의 확대, 장비 국산화를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보름 전엔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행사에서 “한국 대통령이 한일 갈등과 관련해 나의 관여를 요청해왔다”고 까발렸습니다. 그는 마치 핀잔주듯 “나는 이미 북핵 문제, 그 밖에 여러 문제에서 한국을 돕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일에 관여해야 하느냐?”며 한일 당사자 간 문제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트럼프의 거친 언행에는 어지간히 익숙해져 있지만 국가 원수 간의 중요 대화 내용을 복덕방 영감 떠벌리듯이 한 그의 태도에 굴욕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그의 발언은 어쩌면 동맹 관계를 의심케 하는 일련의 상황에 대한 서운함의 표시일지도 모릅니다. FTA 협상과 쇠고기 수입, 사드 배치, 전작권 이양, 남북 대화, 한미 합동군사훈련 등 여러 사안에서 우리 정부나 시민단체들은 미국에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자세를 취해왔습니다. 국내에서조차 한미 동맹이나 우호 관계의 균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 마당에 일본의 경제 제재를 미국 대통령에게 풀어달라는 요청은 좀 겸연쩍고 창피스러운 감도 없지 않습니다. 역시 돌아온 건 준비되지 않은 자의 굴욕뿐입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안보를 담보로 한 도박입니다. 우리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를 협상카드로 만지작거리는 눈치입니다. 일본의 경제 제재가 지속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자는 겁니다. 일본을 완전 배제하고 미국과 종전과 같은 농도의 혈맹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점증하는 러-중의 군사·경제적 위협에 미국은 일본과의 관계를 한층 강화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일본을 배제한 한미 동맹은 아무래도 무망해 보입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는 한미일 군사 협력을 강조해온 미국에게 상당한 자극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한미 동맹의 근간을 흔드는 자충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때맞춰 지난주 합동군사훈련 중이던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 우리 영공을 무단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균열이 일고 있는 한미일 공조의 사정을 찔러보려는 의도적 도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핵 협상 줄다리기 중인 북한도 중재자를 자처해온 우리 정부의 노심초사에는 아랑곳없이 동해로 탄도미사일을 쏘아댔습니다. 김정은은 대놓고 ‘한미 합동훈련과 첨단무기 도입에 대한 경고’라고 공언했습니다. 이 정부의 북한 짝사랑이 초래한 희극일까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대량살상 무기의 위협을 없애겠다며 시작한 남북 대화, 핵 협상이 도리어 한미 동맹의 와해, 우리 국방의 무장해제를 부르는 꼴이 되었습니다.

수출은 우리 경제 발전의 견인차였습니다. 일 없던 시절 일자리를 만들었고, 영세기업을 대기업으로 키웠습니다. 지금 그 견인차가 덜컥거리고 있습니다. 올 들어 4월까지 세계 10개 무역 국가 중 우리나라가 가장 큰 폭의 수출 감소를 기록했습니다. 앞으로의 전망은 더욱 어둡습니다. 이 같은 경제 난국에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마저 마치 100여 년 전의 조선처럼 줏대 없이 흔들거려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장차 이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지금 우리는 그런 기로에 서 있습니다. 보다 멀리, 넓게 내다보고 국방이든 경제든 힘을 기르는 끈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섣부른 정치적 의도와 선동으로 경제를 파탄 내고 안보를 흔들고 국민을 이간질하는 짓을 멈춰야 합니다. 정권이 살기 위해 나라와 국민을 죽이는 짓은 말아야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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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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