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 현숙이 [홍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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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현숙이

2019.07.24

그때가 지난 1월 중순이었습니다. “이번에 자유칼럼에 필진으로 참여하게 됐어. 그런데 문패 이름을 지으라고 하네. 무어라고 하면 좋을까?” “오빠는? 생각해 갖고 와서 물어야지, 무작정 지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그렇네. 안을 만들어서 상의하지.” 며칠 뒤 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뭐야, 자유칼럼 문패 이름은 생각해 봤어?” “응, 그냥 내가 만들어서 통보했어.” “무어라고 했는데?” “곧은결이라고 했지.” “잘 했네.” 그 통화가 내게 보여준 마지막 관심이었습니다.
이틀 뒤 토요일에 누이를 찾아갔습니다. 괴산에 사는 조카 남화가 고모 돌보느라고 와 있었습니다. 고모가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자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소 불안했지만 깨우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이틀 지난 월요일에는 부산의 영도에 갔습니다. 세 살 때의 기억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짬을 못 내고 있었는데 자유칼럼의 첫 글을 그 이야기로 하자고 마음먹었기에 시간을 내었습니다.
그날 밤 서울역에서 심야버스로 갈아타고 집으로 향하던 중 가족 카톡방에 막내동생의 문자가 올라왔습니다. 구급차를 불러서 누이를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고요. 택시로 갈아타고 병원으로 갔지만 대화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누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순 다섯의 나이였습니다.

누이 현숙이는 오 남매 중 셋째입니다. 그러면서 가족들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단지 셋째라는 이유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깊으며 냉정을 유지할 줄 알았습니다. 크고 작은 일로 가족들의 의견이 갈릴 때 중재 역할을 했습니다. 필요하면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고운 심성을 지녔습니다. 어릴 때 일이 기억나는군요.
누가 중학생이던 어느 겨울날, 통행금지 시간(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혼났습니다. 하교 길에 버스 갈아타느라고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다가 할머니가 신문 파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안쓰러워서 대신 다 팔아 주느라고 늦었다고 했습니다. 한 시인은 추도시에서 누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하게 무조건 착하게/손해볼 일 매번 손해보고/한 번도 남에게 손해 끼친 일 없이.”
어느 작가가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한 신문에 쓴 글은 또 다른 면을 말해 주었습니다. “너무도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몸가짐조차 기모노를 입은 듯 지나치게 조신해 뵈는 당신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왜 한마디도 반박을 못했던지요. 그때 당신의 태도는 그즈음 내가 강한 거부감을 느끼곤 했던 가식적 겸손의 표본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그 이유를 나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어요. 당신의 공손함과 부드러움과 단정함은 결코 가식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이며 수양으로 지켜간 덕성이라는 걸 만남이 거듭될수록 확인했지요. 가식은 오래가기 어려운데 당신은 우리가 만나온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러했거든요.”
암 투병 중일 때나 장례식 때, 그리고 봄을 맞아 유골을 묻을 때까지 누이의 많은 지인들이 마음 써 준 일은 누이의 삶을 반영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릴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문에 슬픔의 글을 쓴 위의 작가는 홀로 절에 가서(우리 가족이 불교 신자가 아니었으니) 누이를 위해 49재를 지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나이든 뒤 누이는 나에게 어린 시절의 일로 고맙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내가 중학생일 때 누이를 데리고 몇 차례 동네 3류 극장에 가서 헐리우드 영화를 보여준 일은 어린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구요. ‘영화 몇 편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읽을 책도 집에 별로 갖추지 못했고 여행을 갈 일도 없었으며 가족과 학교 친구 말고는 대하는 사람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 본 영화 중 『지상에서 영원으로』 정도가 기억나는군요.
그 시절 집에서 누이와 누이의 동네 친구만을 앞에 두고 어설프게 만든 그림동화를 시연해 보인 일이 있었습니다. 오빠의 그런 시도는 나이들어서도 가끔 발현되어서 좋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누이에게서 칭찬받은 그런 시도 중 하나는 부모님의 금혼식을 기획한 일입니다. 그때 프로그램 중 한 부분인 비디오의 내레이션 대본을 누이가 썼습니다. 그 속에는 내가 생각지 못한 부모님 생애에 대한 관점이 나타나서 감탄했습니다.

누이와의 관계 중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누이가 고교를 졸업할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등록금이 전액 면제되는 국립대학에 진학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누이는 별다른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철없던 내가 나서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실력에 맞는 학교로 진학해야 한다고 말이죠.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입학금 납부 마감 날 나는 문 곁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을 때 아버지께서 들어서서 “옜다” 하며 내게 수표를 건네주었습니다. 어떻게 구한 돈인지는 여쭐 생각도 못하고 마감 시간에 늦을세라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한 누이는 졸업한 뒤로는 한국브리태니커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적잖은 영감을 받은 듯했습니다. 몇 해 뒤에는 광고기획사 경험을 하더니 다시 몇 해 지나서는 두 사람을 모아 광고기획과 출판을 하는 작은 회사를 차려서 운영해 왔습니다.
나이깨나 들어서야 그런 누이가 오 남매 중에는 가장 의논하기 좋은 상대인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족 중 나이로는 나와 세 살 차이여서 가장 가깝기도 하거니와 사고방식이 통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일을 대할 때 완벽함을 추구하는 태도가 내 맘에 들기도 했습니다. 의논한다고 해서 그리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대개는 사소한 질문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지금 누이가 있다면 “이 글의 제목이 괜찮은가?” 하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질문할 수 없으니 허전합니다.

누이의 유골은 가족묘에 묻었습니다. 자식은 없지만 조카들이 자신들을 끔찍이 사랑해준 고모와 이모를 돌아볼 것이라 믿어서입니다. 비석에는 ‘따뜻하고 섬세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많은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새겼습니다. 지난 5월 말일 전체 가족이 누이의 생일을 기억하여 모였습니다. 기억한다고 해서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네 가지 음식 중 하나인 게장을 먹었습니다. 그날 막내동생은 청평에 있는 묘에 들러서 왔습니다. 동생이 찍은 사진을 보니 누군가가 누이의 작은 비석 앞에 꽃을 놓아두었습니다. 
지난달 미술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어느 그림이 눈에 띄어 잠시 멈춰 섰습니다. 햇빛이 넓은 창문을 통해 실내로 비쳐드는 그림이었습니다. 일부러 그림에 조명을 약하게 한 탓인지 그 밝음이 매우 강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이 그림을 갖고 싶다고 현숙이에게 말하면 무어라고 할까? 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방안이 밝아 보이긴 하겠네. 그렇지만 진짜 햇빛이 아니잖아.’ ‘그래, 실은 나도 같은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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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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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홍승철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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