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서 전봉준 동상을 보며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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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전봉준 동상을 보며

2019.07.05

그 사내의 등은 약간 굽어 있습니다. 민상투에 동저고리 차림인 그는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채 약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지금 막 자리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으려 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이내 두 손을 짚고 분연히 떨쳐 일어설 태세로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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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의 뒷모습

서울지하철 종각역 5번과 6번 출구 사이, 영풍문고 뒤편에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은 뒷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세상을 바꿔보려 했던 조선 사내의 고독과 의분, 그리고 안타까운 좌절을 뒷모습을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앉아 있는 모습의 동상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특이한 형태만으로도 눈길을 끄는데, 측면에서 보면 무언가 응시하고 있는 형형한 눈빛에 기가 질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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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사)전봉준장군 동상건립위원회(이사장 이이화)가 국민 성금을 모아 순국 123년이 된 지난해 4월 24일 제막한 것입니다. 형태가 특이한 것은 서울로 압송돼 구금돼 있던 전봉준(1855~1895)이 재판을 받기 위해 들것에 실려 일본 영사관을 나서는 상황을 재현했기 때문입니다. 1895년 2월 28일 당시 일본인이 촬영한 사진은 전봉준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그 모습을 충북대 명예교수인 조각가 김수현(金水鉉) 씨가 생생하게 되살려냈습니다. 

전봉준 동상은 전주 덕진공원의 ‘전봉준 선생상’(배형식 작)과 정읍 황토현 전적지기념관의 동상(김경승 작)이 대표적인데, 둘 다 농민 봉기와 투쟁을 표현하긴 했지만 장소가 너무 외진 데다 지나치게 선비 같다거나 민상투에 두루마기 차림이 어색하다는 등의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정읍의 동상 옆 부조는 관군과 싸우러 가는 농민군을 소풍이나 가는 것처럼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전봉준 상이 종로 한복판에 설치된 것은 그곳이 그가 구금돼 고문 끝에 교수형을 당한 전옥서(典獄署) 터이기 때문입니다. 전봉준은 교수형을 당하기 전, “너희는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옳은 일이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暗然)히 죽이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23년 후 전봉준은 종로 네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됐습니다. 아니, 그가 돌로 된 좌대(座臺)라는 들것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동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60~70년대에 있던 동상 중 치워져 제자리를 잃은 사례가 있고, 조각 작품 자체에 대한 시비와 논란이 계속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은 그 위치는 물론, 규모나 색깔 때문에 세종대왕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왔고, 이순신장군상은 세워진 지 50년 넘게 ‘엉터리 고증’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동상으로 세워지는 인물은 다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그 모습과 삶을 과장해 거룩하게 만드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동상을 세우는 기념사업이나 유적 복원은 사실(史實)에 충실해야 합니다.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의 전봉준 옛집도 논 세 마지기를 지으며 서당 훈장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그의 살림살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옆집을 헐어 정원을 만들고 부잣집에서나 썼을 뒤주를 부엌에 놓은 걸 복원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동상은 어디에 세우느냐, 그 장소의 역사성이 중요합니다. 동상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을 고발하는 평화의 소녀상을 유행처럼 여기저기 아무 데나 세우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아울러 동상은 크다고 다 좋고 훌륭해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압도하며 내려다보는 동상일수록 친근감과 접근도가 떨어집니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의 한 언덕에 있는 아인슈타인 벤치 좌상은 친구처럼 그 옆에 앉는 게 편할 만큼 작고,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상은 정말 볼품없는데도 전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등신대 동상일수록 호소력과 친근감이 커집니다. 

전봉준 동상은 어깨와 등에 시대의 짐을 걸머진 채 스러져 스스로 역사가 된 인물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절명시를 남겼습니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意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뜻을 함께 하더니/ 시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참된 마음 그 누가 알리." 그러나 지금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종로를 거닐다가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만나 조각 작품과 동상을 세우는 정부와 지자체의 행정에 대해, 이를 통해 드러나는 민과 관의 예술감각에 대해, 거리의 공공미술에 대해 두루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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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한국기자상,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손들지 않는 기자들‘,‘1개월 인턴기자와 40년 저널리스트가 만나다(전자책)’,‘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마르지 않는 붓'(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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