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치하 서울의 석 달, 그 냉엄한 기록

인민군 치하 서울의 석 달, 그 냉엄한 기록
양상훈 주필

남침 사흘만에 서울 거리엔 붉은 기 흔들며 만세 소리… 하지만 국내 좌익들 먼저 사라져

곧 인공국에 질린 시민들 피해 입으며 미군 폭격 기다려
귀환 정부 국군이 실망시켜도 입대 청년들의 눈동자가 희망


    '1950년 6월 28일. 밤새 비는 끊이었다 이었다 하였으나 대포 소리는 한시도 멈추지 아니하였다. … 날이 샐 무렵 전투는 더 치열해지는 듯 대포와 총소리가 콩 볶듯 한다. 가끔 멀지 않은 곳에서 배폭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온다. 벌써 시가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한 분이 보내준 책을 손에 잡지 못하다 6월 들어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 다 읽었다. 6·25 당시 서울대 사학과 김성칠 교수의 일기를 모은 책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 일기'다. 서울 정릉에 살던 그는 서울 시민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피란을 못 가고 졸지에 인민군 치하에서 석 달을 살아야 했다. 그의 일기엔 '인민군 치하 서울'의 적나라한 실상이 가감 없이 적혀 있다.



'미아리 고개로 차보다 크고 육중한 것이 천천히 내려온다. 대포를 맞아도 움쩍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 아닌가 싶다. 돈암동 거리엔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떼 지어 행진하고 있다. 세상은 아주 뒤집히고 말았다. 우리는 좋든 싫은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 아닌 딴 나라 백성이 되고 만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한지 단 3일만에 서울이 점령당했다. 우리나라 육군본부가 그 전날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했기 때문이다.
출처 다음블로그 꽹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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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 일기에 따르면 남침 사흘 만인 6월 28일 이미 서울 거리에 붉은 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김 교수는 '그들 중엔 어제까지 (우파) 대한청년단 완장을 차고 있던 청년도 있었다'고 적었다. 학교부터 인공기가 나부끼더니 7월 초엔 집마다 인공기가 걸리고 담벼락엔 '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한 김일성 장군 만세' '스딸린 대원수 만세' 등의 벽보가 범람하듯 나붙었다. 남녀 학생들의 인공국 지지 시위는 매일 벌어졌다. 대한민국의 장관, 학자들이 라디오에 나와 '이승만 역도'를 비난했다.



김 교수는 '나도 붉고 푸른 잉크로 인공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마주 보고 멋적게 웃었다. 아침저녁으로 국기를 고쳐 그려야 하는 신세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제 시절 사랑방 벽에 태극기를 그려 붙여놓고 어린 가슴을 파닥이던 일이 있었다. 그 태극기를 조용히 뜯어 불사르시던 어머님 뺨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고 나는 그날 밤 순사에게 목덜미를 잡힌 꿈을 꾸고 울면서 잠을 깼다'고 회고했다. 많은 시민이 그 태극기를 버리고 다른 국기를 그려야 했다.

김 교수는 인민군의 첫인상을 나쁘지 않게 적었다. 훈련이 돼 있고 규율도 있는 것으로 보았다. '집 나간 형제가 고향에 찾아온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그악스러움과 잔인하고 가차 없음, 허위 선전 선동에 질려 갔다. 김 교수는 명륜동 인민재판 이야기를 적었다. '따발총을 멘 인민군들이 청년 몇 사람을 끌어다 놓고 군중을 향해 반동분자냐고 물었다. 모두 기가 질렸는데 한두 사람이 악질 반동분자라고 하자 두말없이 총을 쏘아 죽였다.'



김 교수는 이즈음 서울의 가장 큰 문제는 먹을 것이 없고, 어린 학생들의 의용군 동원과 일반 시민의 갑작스러운 '전출'이었다고 했다. 교실에서 누가 '나가자'고 하면 아무도 반대 못 하고 결국 전장으로 보내지는 식이었다. 학부모들은 발만 굴렀다. 갑자기 당의 지시라면서 무작정 타 지역으로 '전출'되는 것도 거의 죽으라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서울대 교수들에겐 '과거 청산'이라면서 '건설대'라는 곳에 지원하라고 했다.

인민공화국은 온갖 개혁이라는 것을 했다. 8시간 노동제, 성별·국적 불문 균일 임금제, 노동 보험제, 임신부 보험제…. 실상은 그 정반대로, 그저 선전 선동일 뿐이었다. 서울의 좌파 정당, 좌익 신문들이 제 세상을 만난 줄 알았더니 제일 먼저 사라졌다. 근로인민당은 흔적이 없어졌고 교직원 노조도 해산당했다.

7월이 지나며 서울 시민의 인민군에 대한 평가는 끝난 것 같았다. 스스로를 '회색분자'라 했던 김 교수는 '미군 비행기가 서울을 폭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는데도 사람들은 비행기를 오히려 기다린다. 일종의 희망 같은 것을 품는다. 군경 가족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용산에 폭탄이 떨어지는데 한 여인이 지붕 위에서 미군 비행기를 향해 흰 수건을 흔들었다고 한다. 김 교수를 찾아온 불문학 손 교수는 "백성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에 이토록 불탄 적은 없었을 겁니다. 인공국을 겪어보고 뼈저리게 대한민국을 그리워합니다"라고 했다.



9월 16일 정릉에서도 은은하게 미군과 국군의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너무 강렬한 기대에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고 썼다. 21일 붉은 완장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23일 미아리 고개를 넘는 북행 행렬이 쉴 새 없었다. 28일 굶주린 서울 시민들이 인민군 군수 물자를 약탈했다. 10월 6일 김 교수 아내는 간직했던 태극기를 다시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국군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는 반반이었다. '술에 취해 있다'는 표현이 많다. 우리 정부와 사회의 부패에 대한 실망도 컸다. 중공군 개입으로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면서 목격한 참상으로 김 교수는 '우리 민족은 지금 벌레'라고 절망했다. 그러나 '국군에 입대하기 위해 우리 마을을 지나는 수만 명 청년들이 비록 몹시 지쳤으나 눈에는 새로운 정기가 돈다. 민족의 희망을 본다'고 적었다. 일기는 대략 여기까지였다. 그는 얼마 못 가 고향 경북 영천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숨지고 말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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