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콜의 ‘눈물’, 부러웠다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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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의 ‘눈물’, 부러웠다

2019.06.21

1996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1916~1996)의 영결식이 유서 깊은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영결식을 지켜보던 독일의 헬무트 콜(Helmut Kohl, 1930~2017) 총리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결국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눈물을 ‘진주보다 아름다운 눈물’이라 칭송하면서도, 왜 그가 눈물을 흘렸을까 의아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필자는 헬무트 콜의 ‘눈물’이 진정 두 거인이 나눈 깊은 우정의 결정체라 생각하였습니다. 삼십오 년 전인 1984년의 역사적인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이자 격전지였던 프랑스령 베르됭(Verdun)에서 전쟁 발발 70주년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프랑스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독일군 전몰자묘역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움으로 다가왔는데, 거기에 더하여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총리는 전몰자기념비 앞에서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묵묵히 조의를 표하였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독일 총리 헬무트 콜이 보여준 아름다운 우정을 지켜본 전 세계 시민들은 그 아름답고 품위 있는 용기에 숙연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프랑스·독일, 독일·프랑스’ 국가 원수들이 전몰자묘역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모습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쌀쌀하였던 날씨도 잊게 하였다고 전해옵니다. (FAZ. 1984. 9. 22.). 그만큼 지켜보던 이의 마음도 온기로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1960년대 초,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었던 독일의 연방군(Bundeswehr)과, 프랑스의 군대는 조약에 따라,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상대국 영역에 진입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필자는 독일의 시민들이 높은 적대감을 가지고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프랑스는 그 어느 나라의 전쟁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승패가 오갔던 아픈 전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본보기가 187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Kaiser Friedrich Whilhelm I.) 황제대관식을 겸한 독일의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 총리가 이끈 ‘보불전쟁(普佛전쟁, Deutsch-Franzoesischer Krieg)의 승전 기념식을 독일에서 거행하지 않고 굳이 패전국 프랑스, 그것도 프랑스의 자존심인 베르사유궁(宮)에서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패전의 결과로 프랑스는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프랑스), Elsass-Lothringen(독일)]이라는 드넓은 국토를 승전국 독일에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독일이 승전 기념식을 자국의 심장에서 거행하는 오만함의 극치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심정은 ’먹물처럼‘ 새까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독일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국민은 서로 끝 모를 증오심만을 키웠던 것입니다. 1960년대 독일에서 지내던 필자도 양국 간의 깊은 증오심을 일상생활에서 수도 없이 실감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양국이 ’역사라는 공간’에서 30년이라는 절대 길지 않은 시간에 두 나라 정상들이 그것도 서로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장소인 전몰자묘역에서 화해의 ‘손에 손을 잡는’ 행동이 충격적일 만큼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역사적인 장면에 독일도, 프랑스도, 세계도 놀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는 헬무트 콜에 대한 저서 《헬무트 콜과 역사의 외투(Helmut Kohl und der Mantel der Geschichte)》 (Gernot Sittner, Sueddeutsche Zeitung Edition, 2016)를 읽고 나서, 그 우정의 뿌리가 헬무트 콜의 엄청나고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헬무트 콜은 그의 총리 임기 16년(1982.10.~1998.10.), 즉 192개월 동안 프랑스를 무려 79번이나 방문하였답니다. 좀 더 수치화하면 독일 총리는 그의 임기 중, 두 달 반마다 이웃 나라 프랑스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여기에 프랑스 대통령이 독일을 찾은 횟수를 고려한다면, 아마 두 나라 정상은 두 달이 머다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상상을 초월한 전무후무한 국가 정상 간의 ‘빈번한 교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헬무트 콜이 노트르담 성당의 영결식에서 ‘마음의 친구’를 영면의 길로 보내는 심정이 남달리 애절하여 눈물이 절로 흘렀을 것으로 짐작하였습니다.

요즘 들어 고인이 된 프랑수아 미테랑과 헬무트 콜, 두 정치 거목을 자주 떠올리는 것은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사이의 거리감이 너무 멀어져,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프랑스 간의 역사는 우리와 일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도 어떤 해법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필자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만남’에서 찾았으면 합니다.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이렇게 ‘황망’한 상태에 이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나 외교와는 거리가 멀어, 필자의 생각은 대중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풀뿌리 대중의 생각에도 일말의 의미가 있다면, 우리 대통령이 일본과의 접촉을 소홀히 하지 말았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 한반도를 멀리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기에 일본과 이웃해야 하는 지정학적 조건이라면 이제는 서로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스에서나 유럽 여러 곳에서나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담고 있는 공통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하되 잊지 않겠다(Forgive it, but never forget it.)'는 다짐입니다. 용서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이를 가장 강력하게 서술적으로 남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 1854~1900)가 했던 “항상 당신의 적을 용서하라, 그것만큼 적을 괴롭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Always forgive your enemies, nothing annoys them so much)”는 글귀가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헬무트 콜의 진주와도 같은 눈물이 부럽게 다가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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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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