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침략한 적 없다고?...나만 몰랐네!/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영상과 함께)


"북한이 침략한 적 없다니…文, 대한민국 대통령 맞나?"


"6.25 참전국 스웨덴서 사실관계 왜곡

문 대통령 부친이 피난민인데" 한국당 비판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 문재인 대통령의 '스웨덴 의회 연설문'이 정치권에서 뜨거운 공방을 낳았다. 특히 6·25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스웨덴에서 행한 발언이란 점에서 야권에서는 "진짜 왜 저러나" 하는 반응이 나왔다.


차명진 전 자유한국당 의원은 17일 페이스북에서 "스웨덴 연설문은 사상이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팩트도 틀렸다"고 주장했다. 차 전 의원은 "이게 일명 수정주의라 불리우는 좌파 학자들의 '쌍방과실설'이라며 "처음엔 북침설을 주장하다가 그게 안 먹히니 남침유도설, 그것도 안 되니 우발적 충돌설로 피해가며 결코 남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태극기에 대한 경례도 거부

난 공산주의자요 하고 차라리 선언하는게

(케이콘텐츠편집자주)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난민 수송 현황. ⓒ정상윤 기자


차 전 의원은 "얼마 전 옛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문서에서 스탈린-김일성-마오쩌둥이 공동 모의한 증거가 공개되면서 다 정리된 사실"이라며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좌파들도 포기한 '쌍방과실설'을 아직도 고집한다"고 비판했다.


文 “남북은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 없어”

앞서 14일(현지시간) 스웨덴을 국빈방문한 문 대통령은 스톡홀름에 위치한 하원 의사당에서 연설했다. 문제의 발단은 '국제사회의 신뢰'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반만년 역사에서 남북은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슬픈 역사를 가졌을 뿐, 그러나 우발적인 충돌과 핵무장에 대한 세계인의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16일 SNS에 '스웨덴을 떠나며'라는 제하의 글에서는 14일 의회 연설 내용을 다시 대외적으로 알리며 강조했다.


민간인과 군인을 합쳐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수없는 피난민이 속출했던 6·25는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했다. 당시 이를 침략으로 규정한 유엔의 결의에 따라 전투지원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등 총 21개국의 군인들이 '유엔군' 이름으로 한반도에 파견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에 곧바로 자유한국당은 이날 저녁 논평을 내고 "문재인 대통령이 6·25에 야전병원단을 파견했던 스웨덴 의회에서 6·25 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며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벌어진 6·25이고, 북한의 남침에 맞서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자유우방의 피로 지켜진 6·25"라고 비판했다.


전희경 한국당 대변인은 해당 논평에서 "북한의 침략전쟁을 교묘히 부정하고, 일방적 피해를 본 우리를 쌍방과실의 한 당사자로 전락시킨 대통령 연설"이라며 "스웨덴에 울려퍼진 대통령 연설이, 정녕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 것이 맞는가"라고 반문했다.




한국당 한 관계자는 17일 본지와 통화에서 "문 대통령이 순국선열을 기리는 현충일날 김원봉을 언급하지 않았나. 그리고 6·25 참전국인 스웨덴에서는 난데없이 북한이 침략한 적이 없다고 한다"며 "이거 진짜 국제적 망언 아닌가. 문 대통령 부친이 6·25 사변으로 북에서 남으로 피난왔던 게 아니었나. 남침이 아니라면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지 묻고 싶다"고 힐난했다.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


“공산 치하에서 벗어나겠다는 피란민들의 의지와 정열이 자신들을 구했다”(알몬드 장군)

 

중공군의 개입으로 동부전선 유엔군 전격 철수

군인 10만명, 피란민 10만명, 1만7500대의 군용차량, 35만 톤 전쟁 물자 안전하게 철수

알몬드·김백일 장군, 포니 대령·현봉학 박사, 함정·상선 200여 척 선장들의 인간애(人間愛)가 기적 만들어내

포니 대령 손자 네드 포니와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 한승경 이사장, ‘제2의 위대한 만남’ 이어가


1950년 12월 24일 미군은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 조치로 흥남부두를 폭파했다. 적군(敵軍)의 부두 접근과 남하를 막기 위해서였다.



  

6·25전쟁은 세계 전쟁사(戰爭史)에 기록되고도 남을 위대한 ‘기적들’을 남겼다. 그중 하나인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린다. 1950년 12월 12일부터 성탄절 전날인 12월 24일까지 13일간 진행된 철수작전으로, 군인 10만과 피란민 10만명이 적지(敵地)에서 구출됐다. 작전에 투입된 전함과 화물선·상선만 200여 척. ‘기적의 배’로 불린 7600톤짜리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피란민 1만4000명을 구해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13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국제시장〉도 흥남철수작전을 첫 장면으로 다뤘다.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2일부터 성탄절 전날인 12월 24일까지 13일간 진행됐다. 군인 10만과 피란민 10만명이 적지(敵地)에서 구출됐고 1만7500대의 군용차량과 35만 톤 전쟁 물자도 안전하게 수송됐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전후(前後) 상황은 대강 이렇다. 1950년 6월 25일 북의 기습 남침으로 국군은 낙동강 이남으로 밀려났다. 이에 국군·미군 등 연합군은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의 배후를 차단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반격을 시작했다. 그 결과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미(美) 제10군단(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동부전선을 맡았고 추가 배속된 국군 제1군단(군단장 김백일 장군)도 동해안을 따라 북진했다.

  

한편 원산으로 진입한 미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은 두만강 유역까지 올라갔다. 미 제1해병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마고원 장진호(長津湖) 방면으로 진격했다.




이 무렵 중공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전황(戰況)은 급변했다. 북한 개마고원 고지대에 있던 미군과 국군이 수적 열세와 강추위로 위기에 처하자 결국 유엔군 사령부는 그해 12월 8일 동부전선 전(全) 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 상황에서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이 펼쳐졌다.

  

흥남철수작전 수행결과 병력 10만명과 피란민 10만여 명이 목숨을 건졌고, 1만7500대의 각종 차량과 35만 톤에 달하는 전쟁 물자가 이남으로 안전하게 옮겨졌다. 덕분에 국군과 유엔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 다음 작전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흥남철수작전의 주역은 김백일(金白一) 제1군단장과 알몬드 미 제10군단장, 그리고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대 대령과 현봉학(玄鳳學)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의학박사) 등이다.

  

작전 초기 알몬드 장군은 피란민 수송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김백일 장군, 포니 대령, 현봉학 박사 등이 알몬드 장군을 끝까지 설득하면서 마침내 ‘기적’을 만들어냈다.



  

당시 국군 지휘부는 피란민을 남쪽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정일권(丁一權)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쓴 수기(手記)의 한 대목이다. 정 총장은 1군단 사령부가 있는 성진에서 김백일 군단장을 만났다고 한다.

  

<김백일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야 군인이니까 민간인 배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모두들 아우성이야. 울면서 제발 이남으로 데려가 달라는 거야. 북괴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알몬드는 군대 수송이 먼저라고 하겠지.(중략)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 한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정 안 되면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편이 낫다. 어차피 북괴놈들에게 당할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육로로 피란민들을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

  

눈물 없이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기 어렵다고 정 총장은 기록했다.

  

알몬드 사령관 고문으로 임명된 현봉학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을 총괄 지휘했던 에드워드 알몬드 미 제10군단 사령관.

  

흥남철수작전에서 현봉학 박사의 역할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영화 〈국제시장〉이다. 영화 초반부에 한 젊은이가 알몬드 장군에게 “장군,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국민들을 도와주세요. 우리가 그냥 떠나버리면 저기 있는 피란민들은 중공군에 몰살당하고 말 겁니다”라고 읍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젊은이가 바로 현봉학 박사였다. 영화 개봉 무렵인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가 현봉학 박사를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는데 〈국제시장〉의 ‘대박’과 맞물리면서 ‘현봉학은 한국의 쉰들러’로 국내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현봉학 박사는 일제강점기 때인 1941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에 들어가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영어를 특별히 잘해 미국 백인들이 구사(驅使)하는 고급 영어를 썼다고 한다.

  

현 박사는 1996년 자서전 《나에게 은퇴는 없다》에 철수작전 당시 긴박했던 상황, 알몬드 장군과 포니 대령과의 만남과 그들의 역할 등을 자세히 남겼다. 현 박사는 전쟁 초기 국군 해병대 문관으로 참여했다. 책의 한 대목이다.

  

<1950년 중순의 어느 하루, 미 10군단 알몬드 소장이 부참모장 포니 해병대 대령을 대동해 자기 군단 소속인 우리 부대에 시찰을 나왔다. 작은 군용기에서 내린 알몬드 소장은 사열이 끝난 뒤 사령관 방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더러 영어를 잘한다며 어디서 공부했느냐고 물었다. 버지니아 리치먼드 주립의대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그는 깜짝 놀라며 자기 고향이 바로 버지니아 루레이(Luray)라며 반가워했다. 그는 또 내 고향은 어디냐고 물어 함흥이라고 하자 다시 놀라며 10군단 본부가 함흥에 있으니 자기 부대로 같이 가자고 했다. 해병대 소속이어서 못 간다고 하자 며칠 후 함흥에서 큰 행사가 있으니 신현준 준장과 나를 오라고 했다. 인간적인 친근감이 가는 포니 대령은 함흥에서 다시 만나자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 알몬드 장군의 고향에서 현 박사가 공부했고, 전쟁이 나면서 현 박사의 고향에 알몬드 장군이 주둔했던 것이다. 1950년 10월 알몬드 장군, 포니 대령과의 첫 만남을 계기로 현 박사는 곧바로 알몬드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임명됐다.

  

중공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면서 흥남철수작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짧은 시간에 피란민 수송 여부를 놓고 아군(我軍) 전쟁지휘부는 고민에 빠졌다. 현 박사는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 함흥 사람들의 사정을 설명하고 민간인 철수를 고려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함흥 기독교인들은 아무 힘도 없는 나를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때마다 나는 알몬드를 찾아갔다. 어떤 날은 들어가지 못하고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기도 했다. 포니 대령은 나를 격려해 주며 같이 청을 해주기도 했다. 알몬드의 입장으로서는 10만의 10군단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도 미지수인데 섣불리 민간인 철수를 포함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흥남부두의 시설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피란민에 인민군이 섞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나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어서 함흥과 흥남의 20만 민간인이 어디로 피란을 갈 수 있겠느냐고, 적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중도에 마치고 귀국을 서두르게 한 하느님의 뜻에 매달려 힘을 얻어 나는 계속 간청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중략) 1950년 12월 초순, 10군단 사령부는 함흥에서 흥남으로 철수했다. 나는 흥남에서 다시 알몬드를 만나 부탁을 했다. 민간인을 내버려 둬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고 간곡히 말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회의에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회의장에는 알몬드 소장과 포니 대령, 민사부 모아 국장,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그 부관이 나와 있었다. 알몬드는 4000명 정도의 민간인은 함흥에서 구출할 결심을 했으니 기독교인과 유엔군을 위해 일한 사람을 우선 철수시키라고 했다. 알몬드 소장 역시 고민을 거듭하여 민간인 철수를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철수를 위한 민간인 접촉은 내가 맡도록 지시했다.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할 줄 알았는데 4000명을 철수시킨다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고맙다고 몇 번이나 머리를 꾸벅거렸다.〉

  

“마지막 배 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잠 못 이뤄”

  

마지막 수송작전에 참여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선장 레너드 라루.


 당초 예정했던 ‘민간인 4000명’은 10만명으로 늘어났다. 배에 피란민을 한 명이라도 더 승선(乘船)시키기 위해 전투 무기 등 필수 물자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바다에 던져졌다. 이 ‘기적’에는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처럼 작전에 투입된 200여 척 함장·선장들의 ‘인간애’도 크게 기여했다.



  

1950년 12월 24일 철수작전의 마지막 단계인 부두 폭파가 시작됐다. 미 해군 함정은 마지막 배가 부두를 떠나자마자 함포사격을 가했다. 적군(敵軍)의 부두 접근과 남하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현봉학 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무려 8000여 개의 포탄이 캄캄한 밤하늘에 둥그런 포물선을 그리며 퍼부어지는 광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고, 추위에 얼어서 남겨둔 400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1000파운드 포탄 500개도 폭격을 맞아 폭발했으니 그날 밤 흥남부두의 야경과 포탄소리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피란 나오지 못한 많은 사람이 흥남부두나 시내에서 희생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날 밤 나는 많은 사람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마지막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운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렇게 1950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은 비참한 역사의 한 장면을 남기고 영원히 가버렸다.〉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이렇게 이뤄졌다. 그때 남쪽으로 온 사람들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도 있었다. 그 피란민들의 가족·친척들은 이제 1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알몬드 장군, 포니 대령, 김백일 장군, 현봉학 박사 등이 흥남철수작전의 주역이라고 하지만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알몬드 장군은 “공산 치하에서 피란하겠다는 사람들의 의지와 정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1973년 현봉학 박사가 알몬드 장군을 찾아가 들은 얘기의 한 대목이다.

  

  〈1973년 뉴욕 한국 방송국의 최미리 여사와 내가 앨라배마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나는 포니 대령과 내가 함흥 흥남지구 피란민 철수를 여러 번 부탁했을 때 가장 결단하기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당시 막강한 적군으로부터의 철수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설명했다. 더구나 민간인 철수에 대해서는 상부인 극동사령부에서 허락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특히 철수시킨다 해도 부녀자와 아이들을 수용할 곳이 없었으며 책임질 수도 없어서 난처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산치하에서 피란하겠다는 사람들의 의지와 정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상이륙(上離陸) 작전 전문가 포니 해병대 대령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대 대령. 작전 당시 알몬드 사령관 부참모장이었던 그는 상이륙(上離陸) 작전 전문가였다. 그는 현봉학 박사와 함께 알몬드 사령관에게 “피란민을 함께 데려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현봉학 박사는 자서전에서 에드워드 포니 대령을 자주 언급했다. 현 박사와 포니 대령은 각각 알몬드 장군의 민사부 고문, 그리고 부참모장으로 있으면서 철수작전 성공을 위해 힘을 모았던 것이다.

  

미 해병대 소속이었던 포니 대령은 상이륙(上離陸) 작전 전문가였다고 한다. 현 박사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포니(Forney) 대령은 부두 관리와 상이륙 작전의 전문가였다. 그의 우수한 부두 관리 능력으로 빠르게 배가 부두에 닿았고, 군수물자와 군인들을 실어 날랐으니 10만명의 군대, 35만 톤의 군수물자, 1만7500개의 차량을 운송할 수 있었다. 미 공병 여단은 부둣가에서 노동자를 5000여 명 정도 고용하여 선적 작업을 마쳤다. 덕분에 배만 오면 피란민들도 실을 시간적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10군단 철수에 APA 6척, AKA 6척, TAP 6척, 상선 76회, LST 81회, LSD 11회가 동원되었고, 피란민 철수에는 빅토리 등 화물선 3척, LST 2척도 사용되었다. 보통 1000여 명밖에 탈 수 없는 LST에 1만여 명까지 태웠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철수작전이 끝난 후 곧 미국 샌디에이고 해병대 기지로 돌아가 상륙작전의 전문가로서 해병대의 훈련을 맡았다. 그가 1951년 1월 24일 내게 보내온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추억이 담겨 있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온 후 자네와 나는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네.…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을 치하해 주어서 고맙네. 사실 나도 그 작전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 작전이 역사에서 사라져버려도 그때 그곳에서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큰 긍지와 만족감을 느낄 것일세. 10만명의 피란민을 자네 고향에서 구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자네 표정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네. 그 표정만으로도 나는 자네의 감사의 뜻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네. 처칠이 말했듯, 피땀 흘려 싸우면 우리의 날이 올 거야. 그날이 오면 자네와 내가 함흥을 방문하고 고성에 다시 내려가 해금강의 바캉스도 가질 수 있겠지.’〉

  

포니 대령은 철수작전 성공으로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휴전 후 3년간 한국 해병대 수석 군사고문관으로 활동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포니 고문관과 김대식 당시 해병대 사령관.

  

포니 대령은 철수작전 직후 해병대 준장으로 승진했고 휴전 후 3년간 한국 해병대 수석 군사고문관으로 활동하며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그는 전략기동부대로서 한국 해병대의 중요성을 당시 한미(韓美) 군당국에 역설하며 한국 해병대의 발전을 이끌었다.

  

현봉학 박사는 포니 대령과의 마지막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전쟁 후 포니 준장과 나는 미국에서도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1964년 크리스마스에는 소식이 없어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1965년 포니가 폐암으로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그의 부인으로부터 받았다. 나는 한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한 미국인을 생각하며 한동안 넋을 놓고 통곡했다. 그는 한국인을 동족처럼 사랑했고 남북통일이 되면 나와 같이 옛 전장을 둘러보자고 거듭거듭 말하였다. 1966년 부활절 휴가 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워싱턴 국립묘지에 있는 포니의 묘소를 찾아갔다. 눈물을 흘리며 헌화하고 파노라마 같은 1950년의 늦겨울을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포니 준장과의 인연을 들려주었다.〉

  

포니 대령 손자 네드 포니, 현봉학 기념사업회 한승경 이사장

  

현봉학 박사는 1951년 이선숙 여사와 결혼한 후 1953년 도미(渡美), 1959년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88년 뉴저지주립대 의대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은퇴 후에는 토머스제퍼슨의대에서 혈액 연구를 계속했다. 현 박사는 2007년 작고했다. 1986년 5월 부인과(가운데 사진) 1960년대 당시의 가족과 함께한 현 박사(오른쪽 사진).

  

올해는 흥남철수작전이 67주년을 맞는 해다. 1950년 12월 당시 알몬드 장군, 김백일 장군, 포니 대령, 현봉학 박사의 ‘위대한 만남’이 없었더라면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살린 그 ‘아름다운 만남’은 67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이어지고 있다.

  

‘제2의 위대한 만남’의 주인공은 포니 대령의 손자 네드 포니(Ned Forney) 씨와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의 한승경(韓承慶) 이사장(우태하·한승경 피부과 원장)이다.

  

네드 포니(54)는 196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소재 ‘레준’ 해병대 기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포니(Edward W. Forney)도 할아버지 포니 대령에 이어 해병대 장교로 근무했다. 네드 포니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네드 포니도 1985년 대학 졸업 후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면서 ‘3대(代) 해병대 장교’라는 기록을 세웠다. 네드 포니는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노르웨이(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등에서 근무하고 대위로 전역했다.

  

현봉학 박사는 1950년 10월 알몬드 장군과 포니 대령을 처음 만난 후 곧바로 알몬드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임명됐다. 사진은 현 박사가 흥남철수 직전 부모를 잃은 어린이를 돌보는 모습이다.

  

이후 네드 포니는 20년 넘게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다. 미 공·사립학교에서 역사를, 이집트·두바이 소재 국제학교에서는 영어를, 중국 인민대학 부속 국제고교에서는 학교장으로 재직했다. 2015년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으며, 현재 6·25전쟁과 흥남철수작전 관련 책을 준비하고 있다. 슬하에 아들과 딸을 뒀으며, 아내는 서울 소재 모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아들 벤저민 포니는 부모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아산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포니 대령의 한국 사랑이 대(代)를 이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네드 포니는 1998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미국 소재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후원으로 한국을 3주 동안 여행하며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는데 그에게 기회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현봉학 박사다.

  

현 박사는 1951년 전란 속에서 이선숙 여사와 결혼한 후 1953년 도미(渡美), 1959년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88년 뉴저지주립대 의대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은퇴 후에는 토머스제퍼슨의대에서 혈액 연구를 계속했다. 당시 현 박사는 코리아 소사이어티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때 포니 대령의 손자 네드 포니를 만났다.

  

세브란스 의전(醫專) 출신의 현봉학 박사 존경하는 연세대 후배들


한승경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 이사장. 한 이사장은 1994년 미국 토머스제퍼슨의대 피부과 연수를 갔다가 그곳에서 현봉학 박사를 처음 만났다.

 

네드 포니 가족이 한국에 정착하는 데는 한승경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도움이 컸다. ‘우태하·한승경피부과’를 운영하고 있는 한 이사장은 2007년 현봉학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만들어진 ‘현봉학선생 추모모임’의 간사를 맡으면서 기념사업에 참여했다. 한승경 이사장은 “모임을 오랫동안 이끈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이 아주대 의료원장 시절 현봉학 박사를 임상병리학 초빙교수로 모시면서 현 박사의 휴머니즘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면서 “현 박사에 대한 이성낙 총장의 존경심이 없었더라면 추모사업은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추모모임’은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6·25전쟁영웅 현봉학’ 선정, 현봉학 박사 동상(銅像) 건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추모모임은 최근 사단법인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로 거듭났고 한승경 원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기념사업회에 참여하는 이들 중에는 연세대 의대 출신이 많다. 세브란스 의전(醫專)을 나온 현봉학 박사를 존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승경 이사장도 연대 의대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한 원장의 선친은 흥남철수작전 당시의 피란민 출신이기도 하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란민 10만여 명을 구한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사진이 담긴 노트북을 손자 네드 포니(오른쪽) 씨와 증손자 벤저민 포니 씨가 들고 있다. 포니 부자(父子)는 한국에 살면서 포니 대령과 흥남철수작전을 다룬 책을 쓰고 있다.

  

한승경 이사장은 현봉학 박사를 생전에 본 적이 있다고 한다. 1994년 미국 토머스제퍼슨의대 피부과 연수를 갔다가 그곳에서 현 박사를 만났던 것이다. 현 박사는 처음 만난 한 이사장에게 고향 얘기와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비화(話)를 들려줬다고 한다. 한 이사장은 현 박사를 ‘모세’로 기억하고 있다. 한 이사장의 말이다.



  

“흔히 흥남철수작전이라 하면 흥남부두 대탈출을 말하지요. 그런데 당시 수많은 병력과 피란민들이 함흥을 거쳐 흥남부두까지 오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작전이었어요. 당시 현 박사님은 알몬드 장군의 ‘피란민도 데려간다’는 결정이 떨어지자마자 함흥 지역 피란민들이 모여 있던 교회로 달려가 소식을 전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모세가 나타났다’며 현 박사를 환호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말씀해 주시더군요. 이후 현 박사님을 생각하면 ‘모세’가 계속 떠올라요.”

  

한승경 이사장은 향후 ‘기념사업’과 관련해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며 “현 박사님의 숭고한 휴머니스트 정신을 계승하고 우리를 도와줬던 미국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일들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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