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방학 나무하러 다니던 날들. [한만수]



www.freecolumn.co.kr

그해 여름방학 나무하러 다니던 날들.

2019.06.17

요즘에는 동네를 벗어난 산은 숲이 우거져서 길이 아닌 곳은 오르기가 힘이 듭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동네에서 십여 리 안쪽은 벌거숭이 민둥산이었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솔잎까지 땔감으로 쓰려고 갈퀴로 싹싹 긁어가는 통에 붉은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산소의 북데기까지 갈퀴로 긁어다 뗄 정도니까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에 땔 나무를 하러 다니는 것이 중요한 연중행사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어머님이 저녁 밥상 앞에서 내일부터 ‘여티’에 불탄 나무(불에 그을린 나무)를 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시며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동네에서 20여 리 떨어진 깊은 산속인 ‘여티’에 지난겨울 산불이 났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20여 리나 되는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이 마뜩잖았지만, 산불이 난 곳이 정확히 어딘지 궁금하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한 동네 사는 고모님하고 어머니 연배가 비슷해서 항상 두 분이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저는 학교에 갔다 와서 리어카를 끌고 나무 마중을 하는 담당이었습니다. 고모님 댁에도 나무 마중을 하러 갈 정도의 나이가 되는 고종사촌이 있었고, 저의 집에도 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 마중은 늘 제 몫이었습니다. 그 점이 억울해서 나무 마중을 갔을 때마다 내일부터는 절대 안 오겠다고 불만은 터트리곤 했지만, 다음날 결국 빈 리어카를 끌고 나섰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풋고추에 된장이며 깍두기 반찬을 싼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산불이 났던 곳까지 가려면 십여 리는 리어카를 끌고 가고, 남은 십여 리는 좁은 산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지게를 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달랑 낫 한 자루만 들고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산딸기도 따 먹고, 입안을 가득 메우는 신맛에 지레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머루도 따 먹기도 하고, 설익은 달래도 한 입 배어 물기도 하면서 불이 난 곳까지 설렁설렁 걸어갔습니다.
불이 난 지역에는 불에 그을린 나무들이 검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이라 꽤 울창해 보였던 숲의 시커먼 땅에는 고사리가 드문드문 서 있었습니다. 어린나무들은 가지가 모두 타 버리고 등걸만 서 있었습니다.

어머님과 고모님은 아까운 나무들이 타 버렸다는 탄식을 터트리면서도 부지런히 낫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산에서 나무를 할 때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오후 서너 시가 될 때쯤에서야 두 단 정도를 할 수 있습니다. 불과 한 시간 만에 끝난 나뭇단에는 갈대며 떡갈나무며 잡목들이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전문 나무꾼들이 먼 산에서 해 온 나뭇단처럼 불감이 좋은 삭정이뿐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칡덩굴로 묶은 나뭇단을 어깨에 지고 십 리를 걸어가야 하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길이 될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무를 하면서 얼굴이며 손은 숯댕이가되어 버렸습니다. 칡넝쿨로 단단하게 묶어 놓은 나뭇단을 바라봤습니다. 풋나무가 섞이지 않은 실한 나뭇단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만 했습니다.

어머님과 고모님은 나뭇단을 두 단씩 했습니다. 두 단을 한꺼번에 머리에 일 수가 없으니까 한 단씩 이고 가서 오리쯤 거리에 내려놓고, 다시 나뭇단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셔서 남은 나뭇단을 머리가 이고 가셔야 했습니다. 리어카가 있는 곳까지 나뭇단을 모두 들고 가려면 왕복 삼십 리나 되는 길입니다. 어른 품으로 한 아름이나 되는 무거운 나뭇단을 이고 나르셔야 하는 힘든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첫 번째 산모퉁이를 돌 때까지는 칡넝쿨이 어깨로 파고드는 고통을 견딜 만했습니다. 두 번째 모퉁이를 돌 때쯤에는 옷은 모두 땀에 젖어 버렸고 얼굴은 땀범벅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뭇단은 출발할 때와 다르게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고, 어깨를 휘어 감은 칡넝쿨이 살을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저녁에 나무 마중이나 왔어야 했는데, 괜히 촐랑거리며 따라왔다는 후회가 밀려올수록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시원한 산바람이 슬쩍슬쩍 얼굴을 스쳐 갈 때마다 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여기서 쉬면 더 이상 못 들고 갈껴. 쪼끔만 참고 가자."
제가 좀 쉬려고 산기슭 쪽으로 몸을 돌릴 때마다 뒤에서 따라오시던 어머님이 만류를 하셨습니다.

쉬고 싶은 걸 참고 한참 걷다 뒤로 돌아서 어머님을 바라보면 어머님은 저보다 더 큰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오시면서도 웃고 계셨습니다. 어머님의 머리에 있는 나뭇단을 바라보면 쉴 수가 없어서 천근만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운 걸음을 다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일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여길 오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결심하면서 고개를 들어 보면 갈 길이 까마득하게 멀어 보였습니다. 그 시절 연탄 한 장에 30원씩 했습니다. 아버님이 피우시는 새마을담배 한 값이 30원, 면사무소에서 퇴근해 오실 때마다 물씬 풍기는 막걸리 한 되에 40원이었습니다.
나무 한 단이면 사나흘 정도 땔 수 있습니다. 연탄 가격으로 나무 한 단 가격을 환산해 보니까 120원 정도였습니다. 남의 집 콩밭을 매줘도 1,500원을 받을 텐데 240원을 벌기 위해 이 고생을 왜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가 했더니, 제가 등에 지고 있는 나뭇단 가격은 100원도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중학교 2학년 15살 어린 나이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과연 친구들 중에 돈 백 원을 준다고 나무 한 단을 들고 십리 길을 갈 친구가 있을까? 어머님하고 고모님은 왜 좀 편한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연탄을 때지, 왜 이 고생을 하실까? 나는 이다음에 커서 연탄만 때며 살겠다는 등 오만가지 불만을 삼키며 걷는 사이에 저 멀리 리어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요? 나뭇단을 부리자마자 벌렁 누웠습니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습니다. 산바람은 또 왜 그렇게 차가운지 더위가 싹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어이구, 우리 아들 다 컸네!”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에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증발해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은 나뭇단을 등에 지고 내려올 때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을 정도의 후회와, 집에 도착해서 나뭇단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뿌듯한 긍지와 보람이 중첩되는 날들로 보냈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그때는 모내기를 끝낸 농촌은 한가한 때라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님은 집에서 노는 것보다 겨울 땔나무라도 하시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그 힘든 길을 다니셨던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시절 집안 살림은 온전히 어머니들의 몫이라서 그 힘든 길을 당연히 받아들이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