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브의 한국 인형

다뉴브의 한국 인형
양상훈 주필

세기적 미·중 대결 시작… IMF 외환 위기가 감기였다면 이번엔 심장마비 올 수도
외교 난제 걷잡을 수 없는데 외교장관은 무얼 하고 있고 대통령은 어디에 있나


     한 달 전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던 한 분은 미국에서 북한 얘기가 거의 사라진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온통 중국 얘기였다. '지금이 중국을 억제할 마지막 기회'라는 미국 정가의 공감대는 확실했다. 시진핑은 '앞으로 100년은 힘을 드러내지 말고 기다려라(도광양회)'던 덩샤오핑의 유훈을 어기고 50년도 못 참고 굴기를 선언했다가 심각한 역풍을 맞고 있다. 물러설 수도 없다. 권위가 훼손돼 중국 내 반(反)시진핑 세력이 고개를 들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이 대결했던 1980년 두 나라의 GDP를 합치면 세계의 30%였다. 두 나라 인구의 합은 세계의 11%였다. 지금 미·중 두 나라의 GDP 합계는 세계의 40%이고 인구는 23%에 달한다. 소련과 달리 중국의 경제 네트워크는 전 지구적으로 얽혀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세계 경제의 절반 가까이가 대립하는 것이고 세계 인구 4명 중 1명이 싸우는 것이다.




1945년부터 시작된 반세기 미·소 대결은 한국의 경제 기적과 기간이 겹친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 진영은 자유민주 최전선인 한국에 온정적이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이 상황을 한국의 국가 전략이 최대로 활용하면서 기적적 번영을 낳았다. 미·소 대결은 한국에 선택의 딜레마가 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소련의 붕괴로 냉전 체제가 사라지면서 곧바로 한국에 IMF 외환 위기가 닥쳤다.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외환 위기는 한국이 삭풍 부는 글로벌 무대에 갑자기 맨몸으로 서게 되면서 걸린 감기였다. 하지만 건국 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미·중 사이에서 딜레마에 놓인 지금은 엉뚱한 길로 가다간 암(癌)이나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를 상황이다.

아베 일본 총리는 대일(對日) 강경 일변도인 박근혜 대통령과 한국을 향해 "어리석다고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면서 미국을 설득하고 있었다. 미·일·호주·인도가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을 포위하고 억제해야 한다는 전략은 지금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 미국은 역사와 전통의 '태평양사령부' 이름을 '인도·태평양사령부'로 바꿨다. 한국이 빠져 있으면서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의 지휘 기관 명칭이 바뀐 이 변화의 의미는 한국 내에서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일본은 중국에 이어 항공모함 2척을 도입하게 된다. 미국이 승인했다. 원래 친일 국가인 인도는 일본과 믈라카해협 부근에서 1년간 다섯 차례나 연합 훈련을 했다. 중국이 인도양에 확보한 스리랑카 해군기지 지척에 일본과 인도가 해군기지를 건설한다. 한국 유조선은 이 기지들 앞을 지나 믈라카해협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리석다고밖에 할 수 없다'는 말이 '한국의 국가 전략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이라면 뭐라고 반박해야 하나. 대북 햇볕정책이 그 대답인가. 햇볕 정책은 국가 전략인가, 정권 전략인가.




현 정부 들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판문점 선언, 평양 공동선언, 한반도 운전자론, 촉진자론, 굿 이너프 딜, 신남방 정책, 신북방 정책, 신베를린 선언, 한반도 신경제 지도, 대일 투트랙 외교 등 국가 전략의 숫자는 매우 많다. 이번에 또 오슬로 선언까지 나왔다. 국가 전략이 많다는 것은 그 나라가 그 전략들을 실천할 만큼 역량이 크다는 뜻이어야 한다.

한국의 역량은 지금 우리 스스로가 실감하고 있다. 미·중 사이에 끼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가장 먼저 미국 편에 섰다. 그런데도 중국은 한국엔 협박하고 일본엔 그러지 못한다. 일본 GDP 대비 대중(對中) 수출은 3%다. 무역이 끊어지면 일본보다 중국이 더 답답하다. 한국 GDP 대비 대중 수출은 10%다. 무역이 끊어지면 중국보다 한국이 더 큰일이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 역량이다. 우리 주위엔 스트롱맨들의 강대국뿐이다. 우리는 강대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강대국의 영향을 받는 나라다. 강대국의 동향을 선제적으로 포착하고 그에 대응해 국가 전략의 진로를 잡아야 한다. 이 기본에서 벗어나면 무슨 멋진 이름을 붙이든 몽상이나 허세, 국내용 쇼일 뿐이다.



얼마 전 늦은 밤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과거 청와대 수석을 지낸 분이었다. "외교장관이 헝가리에 가면 무슨 도움이 되나. 대사관은 왜 두며 대사는 왜 있나. 구조 수색이 외교장관이 할 일인가. 지금 한국의 외교장관이 국가를 위해 할 일이 그건가…." 그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했다. 외교장관이 유람선 사고에 발 벗고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장관이 정작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국가 전략가가 아니라 '인형'으로 불린다고 한다. 외국 방문이 많은 대통령 부부는 '관광지를 빼놓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는다. 대통령은 나이트클럽 사건 수사도 지시한다. 외교·안보 현안은 표류하면서 흘러가고 있다. 어디에 걸려서 멈출지, 거기서 한국이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고 있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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