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른 채 갖게 된 英文 이름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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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른 채 갖게 된 英文 이름

2019.06.04

미국 여행 중 가이드를 맡았던 한 유학생에게서 들은 이야깁니다. 우리네 이름은 한글로 쓰면 겨우 두 자, 길어봐야 넉 자 정도인데 미국 학생들은 그보다 서너 배, 길면 거의 노트 한 줄이 필요할 만큼 긴 이름을 가져서 놀랐답니다. 그런데 정작 서로 부를 땐 샘, 탐, 키티 하고 한두 음절로 끝나 또 한 번 놀랐다지요.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본명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스 4세(William Jefferson Blythe IV)로 꽤 길쭉합니다.

그래서 그녀도 그들이 부르게 좋게 제 이름을 ‘신~영~!’ 하고 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친구는 “헬로, 신!”, 또 어떤 친구는 “하이, 영!” 하고 불렀습니다. 마침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친구가 달리 없어서 그녀는 부르는 대로 응답하며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취업 추천서를 부탁 드린 교수님이 “미스 신!” 하고 부르기에 몹시 당황했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 성이 정입니다.” 하고 밝혔더니 그 교수는 물론 주변 친구들이 모두 “엥, 뭐야? 신? 영? 정?” 하고 어리둥절해 하더랍니다.

동서양이 이름자 나열하는 순서가 다르니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정신영’이란 이름을 ‘Jeong Shin Young’으로 표기했다면 정말 그들이 성을 제대로 찾아 부르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식으로 으레 뒤쪽이 성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나마 동양식 이름을 이해한다고 넘겨짚어 앞쪽을 성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외국인 기업에서 오랫동안 임원으로 일해 온 친구도 같은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이름 석 자를 나란히 띄어 썼더니 사람마다 제 생각대로 한 자를 골라 부르더랍니다. 평소 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인사나 재정 문제가 생길 때는 꽤 심각한 상황으로 번지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문 이름을 쓰는 방식은 가지가지입니다. 성을 앞에 쓰기도 하고, 뒤에 쓰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을 제외한 이름 두 글자 사이를 띄우고, 어떤 이들은 붙입니다. 두 글자를 붙임표(-, hyphen)로 연결하기도 합니다. 미들네임이라는 개념이 없는 우리네 이름에서 두 글자로 된 하나의 이름을 굳이 띄어 써야 할 이유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띄어 쓰곤 합니다.

국립국어원 규정에는 성과 이름은 순서대로 띄어 쓰고, 이름은 붙여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음절 사이에 붙임표(-)를 쓰는 것을 허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붙임표는 두 음절 사이의 음운변화로 생기는 혼동을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이름을 붙여 쓴다는 원칙은 당연한 것이지만 성을 이름 앞에 쓰도록 한 규정에는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외국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규정일 텐데 그들의 관습과는 다르니 여전히 성과 이름을 혼동할 소지를 남겨둔 셈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영문자를 배울 무렵 아이들은 저마다 노트에다 제 이름을 영문자로 써넣곤 했습니다. 겨우 알파벳을 익혀 노트에 써 놓은 제 성은 ‘Bang’이었습니다. 특별히 달리 쓸 생각도 않고 자라면서 그대로 굳어진 영문 이름자는 성인이 되어 해외로 들락거리면서 비로소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 LA 공항에 내렸는데 입국심사 직원이 여권을 들여다보더니 공중에다 손가락질하며 “Bang, Bang!" 하고 짓궂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신씨들이 'Sin'으로 쓰지 않고 ‘Shin'이라 쓰듯이 한때 ’Bahng‘으로 고쳐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썩 마음에 드는 표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물쭈물 해가 가고, “Bang, Bang!" 놀림에도 만성이 되어 제 성은 결국 ’Bang'으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제가 만난 방씨들이 모두 저와 마찬가지로 ‘Bang’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립국어원이 그렇게 쓰도록 규정하기 훨씬 전부터.

프로야구 초기 해태의 강타선을 흔히 ‘KKK 타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연승가도를 달리던 팀의 주축 선수들이 김일권 김성한 김봉연 김준환 김종모 김종윤 등 김씨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 성씨 영문 표기는 똑같이 ‘Kim’입니다. 박씨 성을 가진 이들도 본관이 밀양이건 반남이건 따지지 않고 똑같이 성을 'Park'으로 표기합니다. 친구들에게서 들어보니 역시 어린 시절 누구에게 묻지도 않고 제 생각대로 만들었는데 똑같이 'Park'이더랍니다. 특이하게도 프로골퍼 박세리만이 'Pak'이라는 표기를 택해 화제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사연은 잘 모르겠지만 그의 영문 성씨 표기가 오히려 현재의 국립국어원 로마자표기법에 가까운 셈입니다.

김씨, 박씨 등과는 달리 같은 오얏 이(李)를 성으로 쓰는 사람들의 영문 표기는 뜻밖에 다양합니다. Lee, Rhee, Li 등등. 게다가 조선 왕조는 흔히 ‘Yi-Dynasty’로, 역대 왕 이름은 ‘Yi~’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씨 성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좋을 ‘Yi'라는 표기를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특히 미국에서 공부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Rhee’라고 써 이채를 띠었습니다. 세종의 맏형 양녕대군의 16대손이라는 그가 혹시 멸망한 왕조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게 싫어서 그랬을까요.

김씨와 박씨의 이니셜(로마자 첫머리 글자)이 K, P로 굳어진 것은 소위 매큔·라이샤워체계(The McCune-Reischauer System for the Romanization of Korean)에 따르며 이름의 첫 글자를 격음으로 표기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정부가 한글의 로마자표기법을 바꾸면서 모음 앞에서의 격음 표기를 인정치 않아 이제껏 우리가 써 온 성씨의 표기가 모두 법에 어긋나게 되어버렸습니다. 새 표기법에 따르자면 김, 이, 박, 정은 Gim, I, Bak, Jeong으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규정은 다만 사람이나 회사, 단체 이름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예외를 두어 당장의 충돌을 피했을 뿐입니다.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이 과연 얼마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규정을 제대로 알고 따를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에 맞추어 한글 이름의 영문(로마자) 표기도 처음 외국어를 배우는 교육 단계에서부터 일관성 있게 가르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반사회에서도 여러 가지 공문서 작성 과정에서 관계 기관이 통일된 원칙을 가지고 계도한다면 웬만큼 혼란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이 서로 다른 성을 가진 것처럼 오인되는 희극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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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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