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첩장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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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첩장

2019.05.29

두 달 전의 일입니다. 70 초반의 나이에 청첩장을 보낼 일이 생겼습니다. 젊은 세대의 미혼·비혼(非婚) 풍조가 시대의 고민이 돼 있는 터라, 그것이 청첩인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고, 오래 기다렸던 일인지는 겪지 않은 분들도 짐작은 되실 겁니다.

그러나 막상 이 자리에 초청할 분을 고르는 것은 제법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습니다. 요즘 나이 70은 '청년'이라고 하지만 은퇴한 지 오래된 연금생활자가 대부분이고, 건강상의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나이인 것은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청첩할 분을 정하기에 앞서 제가 최근 1년 사이에 한 번이라도 만났거나 연락이라도 한 분들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친인척들조차도 연락 없이 지낸 세월이 오래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모아 두었던 지인들의 명함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놀란 것은 그중에 청첩대상자가 한 분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의 세상살이가 무심했음을 뉘우치기도 했습니다만, 세상의 인연이라는 게 대개 스쳐지나가는 것이라는 얘기가 실감됐습니다.

혼례를 치르고 나서 드물게 청첩을 못 받은 것을 서운해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께는 청첩이 평소 인사를 소홀히 한 저의 미욱함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길일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제 또래는 물론 저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 가운데에도 자녀들의 미혼으로 고민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분들께는 청첩을 하지 않기로 했으나 보내고 나서 알게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선배에게 청첩장을 직접 전달했는데, 그분이 정색을 하며 “내게도 결혼 안 한 애가 있어”라고 했을 때는 건네던 손이 멈칫해졌습니다. 그런 분들께는 “겪고 보니 인연에는 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라고 위로 겸 송구한 마음을 늦게나마 전하고 싶습니다.

본인이나 가족 중에 우환이 있는지도 살펴봤습니다. 이 역시 잘못 청첩된 경우가 있었다면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의 전화를 받고 기쁜 소식이랍시고 청첩 얘기를 했는데 알고보니 투병 중이었습니다. 하객 명단에서 오지도 않은 그 친구의 이름을 보고 가슴이 메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친족 친지들에게 우편 청첩장 150여장을 보냈고, 전화번호만 있는 50여 명의 지인들께는 카톡과 문자메시지로 알렸습니다. 제가 회원인 한 모임의 총무가 저도 모르게 단체 카톡방에 청첩을 올렸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하객들이 예식장에 찾아와 제 딸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청첩하지 않았음에도 와주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SNS의 전파력의 영향이 아닌가 여깁니다.

서울 시내임에도 우편배달은 한 통에 400원이 넘는 우송료에 배달 시간이 보통 2~3일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우정사업본부는 요금도 없이 순식간에 배달되는 SNS와 어떻게 경쟁하겠다는 것인지, 우편 청첩을 정통의 청첩방식으로 여기는 일반의 관념이 변하지 않을 것으로 아는 것인지, 괜한 걱정도 됐습니다.

딸의 혼례를 계기로 저는 평소 애창곡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새롭게 음미하며 부르게 됐습니다. “...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디로 가는가/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수가 없네/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만나게 될 또다른 사람'이 많을것 같지도 않은 나이입니다. 이번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여러분들만이라도 잊지 않고, 작은 것으로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겠노라고 다짐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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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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