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4년 세계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그녀의 삶도 DDP와 닮았네 VIDEO: Zaha Hadid Architects Completes This Majestic Stadium for Qatar’s 2022 World Cup

사후 4년  세계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그녀의 삶도 DDP와 닮았네


DDP 설계


[죽은 예술가의 사회-25] 

자하 하디드(1950~2016·건축가) 

이라크에서 태어난 영국의 건축가이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해체주의 건축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


서울에 불시착한 우주선 

2014년 서울에 우주선이 착륙했다. 우주선이 서울로 온다는 소식은 착륙 몇 년 전부터 들려왔다. 인간은 낯선 것을 경계한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오지도 않은 우주선을 향해 `괴물` `흉물`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Architect Zaha Hadid Dies at 65 | Architect Magazine | Architects, Obituary, Pritzker Architecture Prize, Zaha Hadid, Zaha Hadid Architects/Architect Magazine


 

Zaha Hadid Architects Completes This Majestic Stadium for Qatar’s 2022 World Cup

After the World Cup, Al Wakrah Stadium‘s capacity will be reduced by removing extra seats, which will be transported to a country in need of sporting infrastructure


By Nick Mafi

May 21, 2019

Soccer is a sport that, when played at its best, has a degree of grace and fluidity that brings people together in unified enjoyment. Much the same can be said about great architecture. Which is what makes the pairing of a Zaha Hadid–designed stadium in the forthcoming World Cup—the largest soccer tournament in the world—so exciting for lovers of soccer and architecture alike.


exterior of soccer stadium

The exterior of the all-new, Zaha Hadid–designed soccer stadium in Qatar.

Photo: Hufton+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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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rchitecturaldigest.com/story/zaha-hadid-architects-completes-stadium-qatar-2022-world-cup



상단 이미지 설명: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카타르 2020년 월드컵 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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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선이 서울에 착륙하면 안된다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주선의 이름은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다. DDP는 조감도가 공개된 순간부터 수모를 겪었다. 한국 건축계는 DDP에 집중포화를 쏟아냈다. 비판의 근거는 다양했다. 알루미늄 패널 4만여 장으로 뒤덮인 DDP 외관은 우주선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낯설었다. 서울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동대문운동장 터에 들어설 건물치고는 전위적이었다. "도시 역사를 무시한 건축"이란 우려가 거셌다. 비용도 문제였다. 공사비는 5000억원에 달했다. DDP는 세금이 투입되는 공공건축이었기에 `혈세 낭비` 논란이 일었다. 


DDP는 올해로 개관 5주년을 맞았다. 이 건물을 둘러싼 우려는 무색해졌다. DDP는 순식간에 연간 1000만명 이상이 찾는 명소가 됐다. `서울 랜드마크`라는 위상도 얻었다. 샤넬, 루이비통, 디올 등 전 세계 패션 브랜드는 앞다퉈 DDP를 전시 장소로 정했다. 봄가을에 DDP에서 열리는 서울패션위크는 서울의 강력한 문화 콘텐츠가 됐다. DDP를 겨냥했던 매서운 말의 기세는 잦아들었다. DDP를 설계한 건축가는 곡선의 여왕으로 불리는 자하 하디드다. 그의 인생은 DDP를 빼닮았다. 하디드도 세상에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버텼고, 끝내 우뚝 섰다. 


 

자하 하디드의 첫 작품 `비트라 소방서`


가장 독특한 소방서 

1981년 스위스 가구 제조사 비트라(Vitra)의 독일 제조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서가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초기 진화에 실패했다. 공장 시설 상당수가 전소돼 비트라는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잿더미 속에서도 기지를 발휘했다. 비트라는 프랭크 게리, 안도 다다오와 같은 스타 건축가를 섭외했다. 그들에게 공장 용지에 새로 세울 건축물 설계를 맡겼다. 예술작품 같은 독창적인 건물이 하나둘 들어섰다. 비트라 공장은 그 자체로 현대건축 경연장이 됐다. 오늘날 `비트라 캠퍼스`로 불리는 이곳은 현대건축과 디자인의 정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비트라가 스타 건축가만 섭외한 건 아니다. 화재에 크게 덴 비트라는 자체적으로 운영할 소방서를 짓기로 했다. 소방서조차 평범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비트라는 설계를 자하 하디드에게 맡겼다. 당시 하디드는 설계 공모전에서 잇달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건축가였다. 하지만 비트라에 지명받기 전까지 실제로 건물을 지은 적은 없었다. 실험적인 하디드의 설계도는 비용와 시공 문제에 부딪혀 번번이 착공 직전 무산됐다. 하디드는 비트라가 준 기회를 붙잡고 처음으로 설계도 바깥에서 자신의 이상을 쌓아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소방서가 탄생했다. 


비트라 소방서는 거대한 조각 작품에 가깝다. 하디드 건축의 특징인 비대칭은 이 건물에서부터 드러난다. `돌로 된 번개`라는 별명을 가진 비트라 소방서는 예리한 사선 패턴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독특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이 건물은 하디드의 첫 작품인 동시에 출세작이 됐다. 하디드는 단번에 건축계 스타로 떠오른다. 곳곳에서 일감이 몰려들었다. 하디드는 20여 년간 전 세계 대도시에서 그곳의 랜드마크가 될 만한 건물을 세웠다. 2004년에는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여성 최초로 받았다. 하지만 승승장구하기 전까지 하디드가 버텨야 했던 시간은 길고, 혹독했다. 1994년 비트라 소방서가 완공됐을 때 하디드 나이는 44세였다. 1980년에 건축사무소를 열었으니 첫 작품을 마주하기까지 14년이 걸린 것이다. 이 14년은 투쟁의 나날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의 `헤이드라 알리예프 센터`


"삶은 격자무늬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아요" 

DDP에는 직선이 없다. 곡선으로만 이뤄진 DDP는 흐르는 물처럼 역동적이다. 거대한 미지의 생물 같기도 하다. 하디드가 태어난 곳의 풍경도 그랬다.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인 하디드는 어린 시절 아득하게 펼쳐진 사막을 보며 자랐다. 허허로운 풍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느꼈다. 소녀는 바람이 불 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는 모래언덕에 마음을 뺏겼다. 유년에 하디드가 마주했던 변화무쌍한 자연의 얼굴은 그의 건축 모티브가 된다. 하디드는 훗날 "당신의 건축엔 왜 직선이 없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삶은 격자무늬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아요. 자연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어느 곳 하나 평평하거나 균일한가요?" 




하디드가 태어난 이라크는 신비로운 자연을 품었을지언정 여성에겐 가혹한 땅이었다. 그곳은 과거에도 지금도 여성에게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불모지다. 하디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하디드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 부녀는 틈날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하디드는 문화권에 따라 달라지는 건축 양식에 호기심을 느꼈다. 사막과 습지대처럼 다양한 자연 앞에서 심미안을 키웠다. 10세가 조금 넘었을 때부터 하디드는 건축가라는 꿈을 갖는다. 그는 잠시 레바논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1972년 영국 건축 명문 AA스쿨에 들어간다. 


자하 하디드(왼쪽 둘째)와 렘 콜하스(왼쪽 셋째).


`아랍계` `여성`이라는 꼬리표 

AA스쿨에서 하디드는 든든한 조력자를 만났다. 조력자 이름은 렘 콜하스다. 한남동 리움미술관 설계에도 참여했던 콜하스는 세계 최고 건축사무소로 꼽히는 OMA를 세운 거장이다. 하디드는 콜하스와 교류하며 건축사상을 키워나간다. 졸업 후에는 OMA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콜하스 밑에서 본격적으로 일한다. 하디드는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고 설계도를 그렸다. 꿈에서나 볼 법한 독특한 건물들이 종이 위에서 탄생했다. 하디드는 1977년에 파트너로 승진했다. 그의 앞엔 탄탄대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편한 길에서 과감하게 이탈한다. 




온전히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하디드는 OMA에서 나온다. 그는 1980년 런던에 건축사무소를 연다. 홀로서기한 하디드는 곧바로 장벽에 부딪힌다. 건축계는 유독 여성이 활동하기 힘든 세계다. 남성 위주였던 건축계는 하디드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성별만 문제가 아니었다. 거장으로 칭송받는 건축가 리스트를 보면 서유럽, 미국 출신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단게 겐조, 안도 다다오 등 몇몇 일본 남성 건축가 이름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주류 건축계는 `아랍계 여성` 타이틀을 가진 하디드를 외계인 취급했다. 하지만 하디드는 악조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83년 홍콩의 `피크 클럽` 설계 공모전에서 1등을 했다. 이후로도 크고 작은 설계 공모전에서 잇달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벨기에 `앤트워프 뉴포트하우스`


`종이 건축가` 

설계도로 명성을 얻은 하디드에게 찾아온 건 일감이 아니라 조롱이었다. 조약돌, 구름, 물결, 우주선 모양의 건물을 그린 하디드의 설계도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주류 건축계는 하디드의 예술성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다만 그의 이상이 실제 건축으로 연결 가능한가에 대해선 의문을 가졌다. 건축계는 하디드에게 `종이 건축가(paper architect)`라는 별명을 붙였다. 오직 설계도만 그릴 줄 아는 애송이 건축가라는 비하가 담긴 별명이었다. `종이 건축가` 딱지는 하디드의 발목을 오래 붙잡았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공모전 상금에 기대 사무소를 겨우 운영했다. 독립 후 10년 넘도록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물을 세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디드는 멈추지 않았다. 직원 10명과 30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할 정도로 밤낮없이 일했다. 훗날 하디드는 "건축이란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말했다. `비트라 소방서`는 고단한 투쟁 끝에 얻은 기회였다. 


2004년 프리츠커상을 받은 후 하디드는 수상소감으로 "30년 전 건축을 시작했을 땐 나의 생각이 주류사회에서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프리츠커상을 단독으로 받은 여성 건축가는 하디드 전후로 단 한명도 없다. 설계도 안에서만 존재할 것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하디드의 청사진은 독일,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코틀랜드, 러시아, 한국, 벨기에, 중국에서 현실이 됐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DDP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자체로 거대한 정원 모양이다. 하디드는 역사적으로 한국인이 정원을 각별히 여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거대한 DDP는 정원과 산책로를 품고 태어났다. 특별한 목적 없이 한가로이 걷고, 쉬기 위해 이곳을 찾는 시민도 많다. 하디드는 한옥의 매력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했다. DDP는 정문, 후문 개념이 없는 뚫린 공간이다. 이런 개방성은 한국 전통가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하디드는 동대문에 깃든 역사에도 주목했다. 그는 조선시대가 남긴 유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역사에 집중했다. 하디드는 동대문 일대에 둥지를 튼 패션타운을 봤다. 24시간 멈추지 않고 꿈틀거리는 그곳의 기운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DDP가 탄생했다. DDP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건 곡선과 더불어 4만여 장의 알루미늄 패널이다. 이 많은 패널은 제각각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사람의 시선, 빛의 세기, 시간에 따라서 패널은 제각각 방식으로 번득이고 꿈틀댄다. 




하디드는 제 나름 한국적인 요소를 DDP에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DDP는 한국적이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런 원성은 해외 건축가를 향한 텃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디드는 늘 다르게 생각하고 독특하게 해석했기 때문에 거장이 된 건축가다. 하디드가 한국이라는 지역성을 해석해 내놓은 결과물은 우리에게 생경했다. 조선시대 역사가 깃든 터였기에 비판의 수사는 날카로웠다. 한국 건축계는 DDP가 등장하기도 전부터 `우리의 역사를 지우는 괴물`이라며 애통해했다. 


1889년에 세워진 에펠탑도 시작은 DDP와 비슷했다. 19세기 말 파리 지식인 사이에선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 "나는 매일 에펠탑 안에 있는 카페에 간다. 파리에서 에펠탑이라는 흉물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여기뿐이니까." 에펠탑은 DDP 이상으로 미움 받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젠 파리를 생각하면 누구나 에펠탑을 떠올린다. 프랑스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았던 에펠탑은 프랑스 그 자체가 됐다. 건축은 시간이라는 옷을 겹겹이 입으며 완성되기도 한다. 


DDP는 에펠탑보다 빠르게 오해를 풀었다. 지금은 괴물이란 오명을 벗고 오아시스처럼 이 도시에 활력을 공급 중이다. 하디드가 공모전 단계에서 DDP에 붙인 이름은 `환유의 풍경`이다. 산, 물결, 바람, 미래, 우주, 도시. DDP가 환유하는 대상은 많다. 정답이 없기에 모두가 정답이다. 하디드는 "건축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이 생각 못했던 풍경을 선사하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DDP는 거대한 언덕이기도 하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걷고, 오르다 보면 축구장 크기 옥상 정원이 나온다. 그곳에서 DDP를 에워싼 서울을 둘러볼 수 있다. 하디드의 곡선 위로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며 누군가는 이전까지 몰랐던 서울의 얼굴을 마주할 수도 있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고, 새로운 꿈을 꿀지도 모른다. 

[조성준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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