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말 한마디면 수년 기획 환경 정책 무산?

나주 ‘SRF 열병합발전소’ 1년 반째 가동 못해


[출구 막힌 쓰레기 대책]

나주 SRF발전소 주민 반대로 가동 못해

폐기물 활용하는 쓰레기 발전소 줄줄이 제동

사업 철수시 6000억 물어줘야 할 수도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갈등 조장”


   지난 9일 오후 전남 나주시 산포면 ‘SRF 열병합발전소’. 생활 쓰레기로 만든 SRF(Solid Refuse Fuel·고형 연료)를 연료로 쓰는 발전소 일대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발전소 입구에는 '아이들이 마루타냐. 가동 반대'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 발전소는 주민 반대에 부딪혀 2017년 12월 준공 이후 1년 반째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날 오후 열병합발전소에서 3㎞가량 떨어진 나주혁신도시 내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회의실. 발전소 가동을 둘러싼 갈등 해결기구인 ‘민관협력 거버넌스’ 7차 회의가 공방 끝에 성과 없이 끝났다. 회의장 밖에서는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이전 공공기관 노조’와 주민 1500여 명이 “발전소 가동 반대”를 외쳤다. 

주민들의 반대로 준공 후 1년 6개월째 가동이 중단된 전남 나주 SRF 열병합발전소 전경. 가동 반대를 요구해온 주민들이 내건 플레카드에 '아이들이 마루타냐. 가동반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2800억 발전소 지어놓고 ‘무용지물’

생활 쓰레기와 폐비닐 등을 에너지원으로 재활용하는 ‘쓰레기 발전소’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발전소 설치를 둘러싼 갈등이 전국 곳곳에서 빚어지고 있어서다. 건립에만 2800억원이 투입된 나주의 열병합발전소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 대표적 사례다.  



  

나주 열병합발전소 가동을 둘러싼 갈등은 2017년 9월부터 시작됐다. 발전소 준공을 앞두고 3개월간 진행된 시험가동 과정에서 “대기환경 오염 물질이 배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1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 배출로 주거지 대기 환경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발해 지금까지도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해당 발전소는 당초 나주혁신도시 공공기관과 아파트에 난방용 열원을 공급하는 동시에 전기를 생산해 판매하기 위해 건설됐다. 하지만 주민 반발에 부딪히면서 주력인 SRF열병합 발전설비는 가동을 멈춘 상황에서 열공급 전용인 LNG 보일러만 가동되고 있다. 

  

“남의 쓰레기를 왜 우리 동네서 태우냐”


주민 반대로 준공 후 1년6개월째 가동이 중단된 전남 나주 SRF 열병합발전소 내부. [중앙포토]


광주광역시와 전남 지역의 생활 쓰레기를 나주에서 한꺼번에 모아 처리한다는 점도 지역 민심을 건드렸다. ‘쓰레기 연료 사용 반대 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에 따르면 나주 발전소에서 사용될 전체 SRF 연료 중 나주 지역 쓰레기로 만든 것은 3%에 불과하다. 나머지 97%는 광주와 전남 6개 시·군에서 발생한 생활 쓰레기로 연료를 만든다.  

  

범대위 관계자는 “정부가 주민이나 이전 공공기관 가족 등과 협의 없이 열병합발전소를 설치·가동한 것부터가 잘못”이라며 “SRF가 ‘신재생 연료’라는 명분 아래 한 도시에서 집중적으로 처리하는 방식 역시 ‘쓰레기는 배출지에서 처리한다’는 원칙조차 외면한 처사”라고 말했다.  



  

쓰레기 발전소 사업이 중단되면서 광주 지역에서는 쓰레기 대란이 일어날 조짐을 보인다. 광주시는 쓰레기 매립량을 늘리면서 버티고 있다. 


발전소 가동 중단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사업 전면 철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나주 열병합발전소 건설에 투입한 2800억원을 허공으로 날리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발전소에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광주·전남 지역에 준공된 ‘SRF 생산시설’도 무용지물이 된다. 광주와 목포, 순천, 나주 등 4곳을 매몰하는 비용만 총 1800억원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나주 발전소를 비롯한 연계시설 처리, 손해배상액 등을 합칠 경우 손해액이 모두 60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사업 주체인 난방공사와 허가권자인 나주시가 모두 부담해야 할 형편이다. 

  

정권 바뀌자 SRF 발전소 줄줄이 ‘제동’


경기 용인시의 SRF 제조업체에서 쓰레기를 고형연료로 만들고 있다. 천권필 기자.


전국 곳곳에서 추진되고 있는 다른 ‘쓰레기 발전소’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기 여주 강천면에 들어설 예정이었던 SRF 열병합발전소는 지난해 말부터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환경운동가 출신의 이항진 시장이 당선된 이후 여주시가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한국폐자원에너지협동조합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전기위원회 심의를 통과한 24개 SRF 발전소 건설 사업 중에서 16곳이 파행을 겪고 있다. 이 중 6곳은 사업을 중단했고, 2곳은 액화천연가스(LNG)로 연료를 전환했다. 정상적으로 운영 중인 8곳은 대부분 문재인 정부 출범 이전에 가동을 시작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SRF 발전소 사업은 유럽과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 유럽의 경우 1999년에 매립 금지법을 시행하면서 재활용이 어려운 폐기물을 연료화한 뒤 국가 간에 이동시켜 소각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역시 90년대 후반에 소각시설에서 발생하는 다이옥신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쓰레기 발전소 사업을 추진했다.  

  

이 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건 2003년 노무현 정부 때다. 당시 매립지가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급증하는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쳐 SRF는 신재생에너지로 분류됐고 각종 지원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세먼지 등 환경 문제가 이슈화되고 발전소 인근 주민의 반발이 커지면서 규제가 강화됐다. 환경부는 2017년 9월 SRF 사용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고, 수도권과 대도시에서는 사용을 금지했다. 


“쓰레기 불법 투기 성행할 것”


경기 용인시의 한 업체에 SRF가 쌓여 있다. 천권필 기자.


SRF 발전소 사업이 줄줄이 좌초하면서 출구가 막힌 폐기물들도 갈 곳을 잃고 점점 쌓이고 있다. 경기 용인시에 있는 SRF 제조 업체에는 3000t가량의 연료화된 쓰레기가 방치돼 있었다.   

   

이 업체 이장근 대표는 “평소의 3분 1 정도의 SRF만 생산하는 데도 보낼 곳이 없어서 쌓아두고 있다”며 “정부의 정책을 믿고 투자했는데 현 정부가 SRF 정책을 전 정권의 오점이라며 버렸기 때문에 우리 같은 업체들은 경영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환경부는 전국적으로 120만t의 불법폐기물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업계에서는 재활용 선별장 등에 방치된 폐기물을 포함해 최소 200만t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쓰레기를 태워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소각장 확대가 한계에 직면하면서 나온 게 SRF 발전소”라며 “정부가 SRF 정책의 일관성을 상실하다 보니 투자하는 사업자의 신뢰도 잃고 주민 입장에서도 정부가 반대하니까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신호를 주면서 양측 간에 갈등을 조장했다”고 지적했다.


박상우 저탄소자원순환연구소장은 “현재 상황이 지속될 경우 쓰레기 불법 투기가 더욱 성행할 것으로 우려된다”며 “정부가 나서서 SRF 시설의 환경을 개선하도록 유도하고 주민과 갈등을 중재하는 등 공공성 강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주=최경호 기자, 천권필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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