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멀스멀 풍기는 위기의 기운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와
이번엔 진짜?
(케이콘텐츠편집자주)

   경제가 고장 나면 시중에 위기설이 돌곤 한다. 지금까지 숱한 위기설이 있었다. 4월 위기설이니 9월 위기설이니 종류도 참 많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달에 위기를 맞이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위기설이 돌면 정부든 민간이든 위기를 막으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한 때문일 수도 있고, 위기설 자체가 억측과 낭설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예고된 위기는 지금껏 현실화된 적이 없었다.

이에 비해 진짜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오길 반복했다. 가까운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랬고, IMF 외환위기도 그랬다. 위기의 원조 격인 미국 대공황도 마찬가지였다. 위기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더 위험스럽게 다가오곤 했다. 그래서 위기의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는 억지로 회피하기보다 경계심을 갖고 바라보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게 역사적 교훈이다.

요즘 왠지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 경제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청와대에선 늘 대수롭지 않다고 일축해 버리니까 말이다. 며칠 전 4월 실업률이 19년 만에 최고치까지 치솟았는데도 "거시경제는 굉장히 탄탄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해석한 건 청와대 핵심 관계자였고, 같은 날 "대한민국 경제력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고 한 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우리 경제가 청와대 생각대로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은 것 같다. 위기가 현실화될 때는 항상 약한 고리부터 끊어진다. 우리나라에선 가장 약한 고리 중 한 곳이 바로 외환시장이다. 소규모 개방 경제의 속성상 외환시장이 위기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다. 위기의 냄새를 가장 잘 맡는 곳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환율 움직임이 수상하다. 원·달러 환율이 조금씩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기울기가 가팔라졌다. 1년 가까이 횡보하던 환율이 불과 한 달 새 드라마틱한 기울기로 올랐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 기업에 도움되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건 상승 속도가 완만한 경우다. 지금처럼 급속도로 환율이 오르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위기의 경험이 그걸 말해준다. 외환보유액이 넉넉하다고 강조해봤자 그건 위기 전에나 효험이 있다. 칼은 휘두를 때보다 칼집에 있을 때 더 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기가 현실화하면 기축통화국도 아닌 우리나라 외환보유액만으론 어림도 없다.

또 하나의 약한 고리는 서민금융이다. 위기가 오면 취약한 계층부터 먼저 충격을 받는다. 저축은행 연체율이 지방에서 갑자기 8.0% 가까이 오른 건 그래서 징후가 좋지 않다. 지방 제조업이 잇달아 쓰러지고, 자영업 기반이 붕괴되면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우려했던 게 현실화한 꼴이기 때문이다.

더 큰 걱정은 이번에 위기가 발생하면 과연 우리가 예전처럼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외환위기 때는 외부의 힘을 빌려 기업과 산업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경제 체질을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전 국민적인 위기 극복 노력도 큰 힘이 됐다. 금 모으기로 대변되는 한국식 위기대응은 엄청난 시너지를 냈다.



금융위기 때는 한미 통화스왑으로 급한 불을 껐고, 5.25%이던 기준금리를 불과 6개월 만에 2.0%로 낮추면서 경기 불씨를 살렸다. 무엇보다 중국 특수가 우리를 먹여살렸다. 중국이 재정 4조위안(당시 800조원)을 투입해 내수와 수출을 늘리면서 성장률이 10%대로 다시 올라섰고, 그 과실을 우리가 절묘하게 따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준금리(1.75%)도 이미 너무 낮고, 중국 특수도 없다. 각자도생에 익숙해진 국민들이 금 모으기에 나설지도 불확실하다. 더 근본적으로는 외환·금융위기 때는 펀더멘털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실물경제에서 먼저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 마당에 외환과 금융시장마저 문제가 생기면 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될 수 있다. 우리가 이번에 주저앉으면 아주 오랜 기간 일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드는 이유다. 그래서 지금 절대로 위기가 오면 안 된다. 그러자면 청와대부터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게 우리 경제도 청와대도 살길이다.
[정혁훈 경제부장]매일경제
케이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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