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양도 여자 이야기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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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 여자 이야기

2019.05.16

오늘은 섬에 사는  어떤 여자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그 섬에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그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혼자 주문을 받아 커피를 타고, 손님이 많지 않을 땐 차를 날라다 주기도 합니다. 성격이 무척 명랑하고 바지런해 보입니다.
그 여자의 성도 이름도 모릅니다. 남편은 고기 잡는 뱃사람이며, 아이 넷을 가진 엄마라는 것만 압니다. “이 섬이 고향이냐”는 질문에 그녀의 수다가 터지면서 알게 된 정보일 뿐입니다.

그 여자가 사는 섬은 비양도(飛揚島)입니다. 제주도에서도 바다 색깔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협재 해수욕장을 더욱 아기자기하게 장식하는 액세서리 같은 존재, 그 섬이 바로 비양도입니다. 멀리서 보면 흙 한 줌을 바다에 얹어놓은 모양이지만 넓이가 17만 평이고, 비양봉 꼭대기는 해발 110미터나 됩니다. 
4월 말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동료와 함께 비양도를 방문했습니다. 한림항에서 ‘비양도천년호'를 타고 15분쯤 물살을 가르니 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섬을 한 바퀴 돌고 비양도 꼭대기도 올라볼 계획을 잡았습니다. 부두를 나오자 청바지를 입은 날씬한 중년 여자가 방문객들에게 “여기서 점심 드세요. 보말 죽 맛이 끝내줍니다.”라고 말하며 식당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보말은 제주도 바다에서 나는 고동 종류입니다.
“점심은 나중에 먹고, 다방 있으면 커피나 마시고 싶은데요.”라고 했더니 청바지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요새 다방이 어딨어요? 저기 골목길로 가면 올레카페가 있어요. 내 동생이 하는 가겐데 참 좋아요.”

카페엔 손님이 한 사람도 없고 카운터에 여자만 앉아 있었습니다. “섬을 한 바퀴 돌기 전에 커피나 할까 해서 이곳에 왔는데, 부둣가에서 청바지 아줌마가 이 카페를 소개해줍디다.”고 얘기하자 “아, 우리 시누이 만났구나. 언니가 비양도 사무장 노릇합니다.”라며 반겼습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자, 그녀는 커피를 만들면서 비양도 동네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정확한 정보인지 모르지만 그녀가 말해준 요지는 이랬습니다.

이 섬에 사는 사람은 48명인데, 주민등록상 주민은 그 배가 됩니다. 주민에겐 배삯도 공짜고 삼다수도 매우 헐값으로 제공되고, 이밖에도 여러 가지 혜택이 있습니다. 마을 주민이 주주가 되어 만든 도항선 ‘비양도천년호’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돈벌이가 잘되어 연말 배당금을 주민들이 꽤 많이 받는다는 겁니다. 한여름에는 하루 1천명의 방문객이 찾아옵니다. 비양도에서는 고기잡이와 해녀일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배가 생계수단입니다. 카페 여주인의 시집 식구가 일곱 가구나 됩니다.

“고향이 이 비양도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녀는 “제 고향은 포항 아닙니꺼.”라고 대답했습니다.
“포항 사람이 어쩌다 비양도까지 흘러왔나요?”
그녀가 시를 읊듯이 대답했습니다.
“아~ 20년 전 그날 밤 그 달빛 때문에.”

소녀는 포항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제주 출신 친구와 함께 제주도를 구경하러 비행기에 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리자 친구는 소녀를 데리고 자기 집이 있는 섬, 비양도로 배를 타고 갔습니다. 당시 비양도에는 카페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친구는 심심해하는 그녀를 데리고 뱃놀이 나가는 어선에 탔습니다. 고요한 바다 위에 달빛이 반사되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청년 어부가 배를 몰고 있었습니다. 달빛에 반사된 청년의 얼굴이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소녀는 이 청년 어부에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뱃놀이를 끝내고 포항으로 돌아왔지만, 소녀의 마음속에서는 달빛 속 청년 어부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만 청년에게 연애편지를 쓰고 말았습니다. 제주도로 가서 만나보고 싶다고. 이 낌새를 안 소녀의 집에서는 야단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부모 몰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날아갔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녀의 아버지는 혼절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결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비양도 청년 어부와 결혼했습니다. 아이를 넷씩이나 낳았습니다. 그리고 낚시 배를 운영하는 남편과 20년을 살았습니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나가고 아내는 카페를 운영합니다.
둘이 하는 일은 전혀 성질이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날씨가 나빠 파도가 세면 남편은 고기잡이를 나갈 수가 없고, 아내는 손님이 없으니 장사가 안 됩니다. 어쨌거나 그 여자는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카페를 나오는 우리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노랑 파라솔이 세워진 음식점에서 꼭 보말 죽을 맛보고 가셔요.“

섬을 한 바퀴 돌고 비양봉 정상에 있는 쌍둥이 분화구를 한 바퀴 도는 데 두어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양봉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 높은 한라산이, 북쪽으로 수평선이 떠 있습니다. 남쪽 하면 바다가 떠오르는 게 한국 사람들의 정서일 텐데 비양도에서만은 정반대입니다.
산을 내려오니 노랑 파라솔을 너덧 개 마당에 쳐 놓은 식당이 있었습니다. 비양도 사무장, 즉 카페 주인의 시누이가 운영하는 음식점입니다. 보말 죽을 한 그릇 먹고 배를 타고 비양도를 나왔습니다. 비양도 시누이와 포항 올케의 입과 손의 조종을 받고 보낸 한나절 여행이었습니다.
70억 명이 사는 이 세상에는 그만큼의 다양한 삶이 있습니다. 가장 행복하고 가장 불행한 사람 사이에 스펙트럼은 정말 넓습니다. 사람의 내면은 알 수 없지만, 포항댁에겐 비양도가 ‘행복의 섬’인 듯합니다. 애를 넷씩이나 낳았으니 요즘의 애국자이기도 하고요.

**비양도는 1002년 화산이 폭발해서 생긴 섬이다. '비양도천년호'는 비양도1000년 역사를 기념하여 붙인 배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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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섬(비양도)에서 바라본 큰섬(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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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의 동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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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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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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