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붐비던 '담배 마을'은 지금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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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붐비던 '담배 마을'은 지금

2019.05.15

지난 주말에 고향 근처에 있는 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산 중턱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친구가 주지 스님으로 있는 곳입니다. 암자까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스님은 사월초파일 행사를 앞두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사채 마루에 찻상을 마주 두고 앉았습니다. 푸른 치마를 펼쳐 놓은 것 같은 산 아래 동네는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동네 들판이며 뒷산은 온통 포도밭이었습니다.

포도밭에는 하나같이 비닐로 비가림 시설을 설치해 놨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이 펄렁거리며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광경이 파도가 밀려다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즈음은 다들 먹고살 만하지?”
한낮인데도 골목 안에는 강아지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정적에 싸여 있는 동네를 내려다보며 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차 몰고 읍내 마트로 장 보러 다닐 정도는 되지.”
스님도 신도 수가 적어서 포도를 재배하다가 요즈음은 블루베리로 과종(果種)을 바꿨는데 지난해 수입이 변변찮았다는 겁니다. 그래도 도시서 월급쟁이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습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암자 아래에 있는 동네는 전형적인 산골 빈촌이었습니다. 골짜기에 있는 동네라서 밭농사만으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사는 동네였습니다. 포도 농사를 짓기 전에는 검게 그을린 슬레이트 지붕이 피란민 판자촌을 연상케 했었습니다.
포도밭은 모두 담배밭이었습니다. 5월쯤이면 담배 모종이 뿌리를 내리고 단단하게 키를 세우고 있을 때입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7월은 담배를 수확하는 시기입니다. 담배를 수확할 때는 온 집안 식구가 총동원됩니다. 아녀자들은 담배를 따서 옮기기 좋도록 단을 만듭니다. 힘이 좋은 남정네들은 산 중턱에서 담배를 지게에 집니다. 어깨에 피멍이 들도록 무겁게 진 담배를 평지까지 져 내리면 리어카나 달구지를 이용해서 마당까지 옮깁니다.

그늘이 짙은 감나무 밑이며, 황초굴에서 1차로 건조한 담배는 조리작업에 들어갑니다. 마루 위는 말할 것도 없이 마당이며 골목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담배를 집으로 무청 엮듯 엮어야 합니다. 이미 담배를 딸 때부터 손바닥이며 팔뚝은 시커먼 담뱃진이 문신처럼 시커멓게 배어 있습니다.

날이 선선할 때 담배를 딸 욕심으로 샛별을 바라보며 바쁘게 담배를 따기 시작한 까닭에 제대로 밥을 먹지도 못했습니다. 배가 등짝에 달라붙을 정도로 허기가 졌지만, 이놈의 담배를 수매하면 목돈이 들어온다는 생각, 자식놈의 밀린 학자금을 줄 수 있다는 뿌듯한 기분에, 요즘 들어서 부쩍 기운이 없어 보이는 늙은 부모에게 고깃근이라도 끊어 올 여유가 생긴다는 희망에 젖어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담배를 엮습니다.

고단한 몸에 눈꺼풀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저절로 감기는 것을 참아가며 담배를 엮다 보면 부지런한 수탉이 새벽을 알립니다. 담배를 엮던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져 파김치가 된 몸을 눕힙니다.

동네마다 이층집 높이로 흙벽돌로 지은 담배 건조창고가 몇 채씩 있습니다. 건조창고 앞에는 전매청에서 외상으로 준 석탄이 쌓여 있습니다.

담배가 고르게 건조될 수 있도록 벽에는 말목이 사다리 형태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땀으로 목욕을 하며 담배를 걸고 나서 불을 땝니다. 건조장 가득 채운 담배를 건조하려면 이삼일은 밤낮으로 불을 때야 합니다.

석탄을 태우다 보니 이산화탄소 가스 냄새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닙니다. 그래도 그 냄새에 고개를 흔드는 이들이 없습니다. 돈이 들어오는 냄새라는 생각에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벙글벙글 웃기 일쑤입니다.
건조장에서 건조한 뒤 색깔별로 구분을 해서 보기 좋게 반듯하게 묶어 단을 만듭니다. 담뱃단은 습기가 차지 않는 골방에 고이 모셔둡니다. 첫서리가 내릴 무렵이면 달구지에 실어서 담배조합에 팔러 갑니다.

담배창고 앞의 넓은 마당에는 천막이 쳐지고, 대처에서 전매청 직원이며 군청 직원이 장기 출장을 옵니다. 장터에 있는 세칭 색싯집에서는 대처에서 적게는 두세 명, 많게는 서너 명씩 색시들을 데려옵니다. 더불어서 도박꾼들도 색싯집 구석방을 얻어서 꾼들을 모집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담배 수매를 시작하면 등급이 매겨집니다. 누가 봐도 1등급처럼 보이는 담배에 2등급 도장에 찍히는가 하면, 3급도 안되 보이는 담배에 1등급 도장이 찍혀서 담배창고 안으로 빠르게 운반이 됩니다.

질이 안 좋은 담배로 1등급을 받은 쪽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질 좋은 담배로 2등급을 맞은 쪽은 담배 수매를 포기하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사이에 해가 집니다. 장터 여기저기는 초상집처럼 모닥불이 벌겋게 밤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닥불 주위에는 뜨거운 국밥에 곁들여 배가 터지도록 마신 사람들이 모닥불만큼이나 벌게진 얼굴로 서 있습니다.

색싯집의 큰 방에서는 전매청이며 면사무소, 담배조합의 간부들이 색시를 옆구리에 끼고 '홍도여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라고 목청을 높이고 젓가락으로 상이 부서져라 두들기고 있습니다. 구석방에서는 꾼들의 꾐에 빠진 새카만 손들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으로 화투장을 쪼고 있습니다.

누구는 화투판에서 돈을 모두 잃고 야반도주를 했고, 누구는 담배를 수매한 돈으로 땅을 샀다는 소문이 새벽같이 골목을 누비던 동네에 있는 집들은 모두 양옥집입니다. 느티나무 밑의 그늘은 사람들 대신 승용차며 트럭들이 차지하고 있는 동네는 그지없이 조용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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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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