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말을 한다면 [임철순]



www.freecolumn.co.kr

꽃이 말을 한다면

2019.05.13

“사월이라 맹하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농가월령가 4월) 8일 후(21일)면 소만(小滿)입니다.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인 소만은 24절기 중 여덟 번째로, 만물이 점차 생장해 세상에 가득 차게 되는 시기입니다. 모내기도 곧 시작됩니다. 

지금은 꽃도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니, 이미 절정을 넘은 꽃들이 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음력 4월은 앞에 나온 대로 초여름[孟夏]이니 송춘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사력을 다해 한사코 피어난 꽃들을 보노라면 봄의 짧음과 꽃의 하염없음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나이가 든 노인들은 특히 봄과 꽃에 민감합니다. 

1973년 가을, 한국일보 입사시험에 한시 해석 문제가 하나 나왔습니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연년세세화상사 세세연년인부동)’ 두 행이었는데 "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하건만 사람은 해마다 달라져가는구나"라고 써냈습니다. 모르는 글자가 없는데도 번역하기가 참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그 시가 당 시인 유희이(劉希夷)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이라는 것도 몰랐지만, 젊은 나는 그때 왜 하필 늙는 이야기를 문제로 냈는지 의아했습니다. 

그 시를 충분히 이해하게 된 지금은 출제자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두옹은 늙음과 청춘을 이야기하거나 학문과 석시(惜時)의 중요성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백두는 흑발의 반대어입니다. 그리고 꽃을 말할 때 백두옹은 머리가 흰 할미꽃을 뜻합니다. 지봉 이수광의 칠언절구 ‘백두옹을 읊다[詠白頭翁]’는“청춘은 본디 늙기 쉬움을 알아야 하니[須識靑春元易老] / 화초 중에도 머리 허연 백두옹이 있다오[草中還有白頭翁]”로 끝납니다. 

할미꽃은 어느새 허리가 휘면서 꽃받침이 떨어지더니 지금은 꽃이 다 지고 흰 머리칼 같은 홀씨가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손만 대면 가루처럼 흩어집니다. 땅으로 떨어지기 위해, 다른 곳으로 날려가기 위해 할미꽃은 목숨을 바꾸고 있습니다. "천만 가지 꽃 중에 무슨 꽃이 못 되어 가시 돋고 등 굽은 할미꽃이 되었나"라는 동요가 있지만, 할미꽃이든 호박꽃이든 꽃은 다 아름답고 어여쁘고 소중합니다. 

꽃이라는 글자는 정말 꽃처럼 생겼습니다. 우리말은 중요하거나 아름답거나 의미가 큰 것일수록 한 글자로 돼 있습니다. 별 달 말 길 술 떡 산 강 물 돈 똥 꿈 돌 삶 눈 손 창…등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한 글자가 아닌가? 아쉽고 유감스럽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말은 결국 꽃이 사람보다 더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런 꽃을 사람들, 특히 나이든 사람들은 혼자 간직하고 즐기는 것을 넘어 남들과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요즘도 매일 휴대폰으로 꽃 사진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찍은 꽃이 남들이 만난 꽃과 특별히 다른 것도 아닌데, 공해라고 할 만큼 시도 때도 없이 사진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좀 심통이 나서 당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모란을 보며 마시다[飮酒看牧丹]’를 띄워 찬물 한 바가지 끼얹은 일도 있습니다. 

오늘 꽃 앞에서 마시다 보니[今日花前飮]
기분 좋아 몇 잔 술에 이내 취했네[甘心醉數杯] 
다만 한 가지 걱정은 꽃이[但愁花有語]
(당신 같은) 노인들 위해 핀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不爲老人開] 

꽃은 누구를 위해 피겠습니까? 꽃은 꽃의 길을 따라 햇빛과 바람에 기대어 스스로 피고 스스로 집니다. 그런데도 노인들은 꽃이 자신들을 위해 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해마다 피는 꽃이 자신들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올해 꽃이 지고 모습도 바뀌는데[今年花落顔色改] 내년에 꽃 필 때 누가 살아 있을까[明年花改復誰在]” 하는 생각(‘대비백두옹’) 때문이지요. 12일 끝난 태안(충남) 튤립축제에서는 몸이 ㄱ자로 굽은 시골 할머니들, 자녀가 미는 휠체어에 앉은 노부부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은 꽃구경을 하러 꽃과 만나기 위해 나왔지만, 내게는 꽃과 작별하러 온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

태안 튤립축제에 등장한 대형 '꽃 강아지'(위)와 각종 튤립(아래)..

.

.

.

그런데 꽃도 사람처럼 말을 한다면 ‘年年歲歲人相似 歲歲年年花不同[해마다 사람은 비슷하건만 꽃은 해마다 달라져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람은 꽃이 다 비슷하고 그게 그건 줄 알지만, 꽃의 눈으로 보면 사람도 다 어슷비슷하고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지 않을는지. 잘나거나 못나거나 크거나 작거나 돈 많거나 없거나 오래 살거나 단명하거나 희거나 검거나 꽃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지 않겠습니까? 꽃의 눈으로 보면 사람은 수도 없이 많고 끝도 없이 세상에 나오는 존재일 것입니다. 

‘대비백두옹’ 시에 이미 “예전에 꽃을 보던 사람 이제는 없고[古人無復洛城東] 꽃 떨어지는 바람 앞에 지금 사람이 서 있네[今人還對落花風]”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나라는 단독자, 개별자는 없어지지만 사람이라는 종(種)은 끝내 절멸하지 않고 지금 사람이 자꾸 나오니 꽃이 굳이 누구를 위해서 피고 말고 하겠습니까? 

왕유(王維)의 ‘송춘사(送春詞)’를 읊어보면서 그 의미를 오롯이 새겨야 할 때입니다. 

사람은 날마다 덧없이 늙어가지만[日日人空老]
봄은 해마다 다시 돌아오나니[年年春更歸]
웃고 즐기세 술은 푸지네[相歡有樽酒]
떨어져 날리는 꽃 아쉬워할 것 있나[不用惜花飛]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한국기자상,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1개월 인턴기자와 40년 저널리스트가 만나다(전자책)’,‘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마르지 않는 붓'(공저).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