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고향 찾기 가족여행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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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에 고향 찾기 가족여행

2019.05.03

젊을 때 본 미국 영화에 ‘7년 만의 외출’이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7년 만에 고향을 찾았습니다. 고향이란 통념(通念)은 본인이 태어나고 친척이 많이 사는 고장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이런 개념에 해당하는 고향은 아닙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 초등학교를 다니다 부모를 떠나 홀로 외가가 있는 한반도 남단의 섬에 와 초등학교 6년과 광복 전후 2~3년 동안만 살았던 곳을 고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몇 년 후 귀국한 부모님은 본적지 경남 고성(固城)을 떠나 남해(南海)로 분가하여 정착했습니다. 조부님의 고향은 개성(開城)이었는데 조선(朝鮮) 말에 서울에서 관직에 계시던 중 혹심한 당파싸움에 휘말려, 남해로 피신해 왔다가 고성에 정착했다는 기구한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부님 고향 개성에는 ‘황산’이라는 곳에 평해(平海) 황씨 가족묘지가 있어, 아버지는 가족 중 유일하게 이곳의 성묘 차례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광복 후 서울로 주소를 옮긴 후에도 생전에 통일이 되면 고성에 있는 종가 조카들을 꼭 안내하고 싶다고, 매년 음력 8월 2일의 집안 성묘의 날에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부산의 직장에서 일하다 1953년 환도 때 서울로 옮겨와 지금까지 60여 년을 살아온 저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남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친척이나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거의 없는 이 남해를 찾아 2박3일의 가족휴가에 나선 것입니다.

한 해 두세 번 가족여행을 하는 것이 우리 집 관례였습니다. 7년 전 남해를 찾은 것도 그랬습니다. 지난해에는 제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 약간 회복한 가을에 강릉에 가서, 아이들이 미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딱 한 번 가족여행을 즐겼습니다. 금년 들어 호전되는 듯하던 건강이 이번에는 노인에게 극히 위험하다는 폐렴으로 번져 한동안 입원까지 한 끝에, 현대의학의 훌륭한 약과 의료진의 헌신적 노력으로 다시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빠른 회복을 기뻐하는 가족들이 금년 첫 가족여행 목적지를 남해로 정하고, 좀 거리가 멀지만 아버지 체력 상태를 검증하기 위해서 굳이 아버지 고향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저로서는 고령으로 이번이 마지막 고향방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아이들도 참가시키기 위해, 교통 혼잡을 각오하고 주말을 이용, 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가족 여덟 사람이 여섯 시간 이상 걸린 긴 여정에 나섰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기막히게 좋아 7년 전에 묵었던 그 해변 리조트의 빌라에 묵으며 즐거운 2박3일을 보냈습니다.

친척이나 친구를 찾는 여행이 아니니, 모든 시간을 관광과 휴식과 맛있는 먹거리 찾기에 보냈습니다. 해변의 소나무숲 사이로 멀리 광양공업단지와 여수항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는 넓은 거실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온 악기로 가족노래방 놀이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7년 전에는 초라했던, 남해가 자랑하는 ‘독일 마을’도 그사이 많은 볼거리와 독일음식을 제공하는 카페 등이 새로 들어서 휴일의 주차장은 혼잡을 이룰 정도로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은빛 모래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해안으로 유명한 남해 최대의 상주 해수욕장은 아직 정식 개장은 안 했지만 전동바이크를 즐기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지족(只族)의 죽방렴과 유채꽃이 만발한 가천(加川) 다랑이마을도 둘러봤으나, 중학생 때부터 몇 번 등산한 금산(錦山)은 휠체어로 올라갈 수 없어,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한때 수양했다는 보리암도 이번에는 찾지 못했습니다.

이번 여행에 뜻하지 않은 보너스가 있었습니다. 떠나는 날 점심은 안의(安義)의 이름난 갈비집에서 먹을 예정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출발 후 차내에서 전화를 걸었더니 월요일은 휴점이라 했습니다. 당황한 가운데 한 아이가 인터넷에 같은 이름의 갈비집이 진주(晉州)에도 있다고 해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진주성(晉州城) 근처에 있는 그 음식점에서 식사한 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 유명한 진주성에 가보자고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해, 우리는 촉석루, 의암(義岩) 등 임진왜란 때의 사적을 중심으로 깨끗하게 정비된 진주성을 둘러보는, 예정에 없던 관광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주는 일제 말기 5년 동안 혹독한 군사훈련과 식량부족으로 허덕이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중학 시절의 애환(哀歡)이 얼룩진 저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이곳 역시 생애 마지막 방문이 될지도 몰라 저는 유독 감회가 깊었습니다.

예정에 없던 이 진주 방문으로, 서울 집에 돌아온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 전원 무사히 즐겁게 이번 가족여행을 마치게 되어, 벌써 다음 여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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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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