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최면과 광기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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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최면과 광기

2019.05.02

1894년 프랑스 참모본부의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는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아 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그는 종신유형 판결을 받고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에 갇혔습니다. 프랑스군 정보팀이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서 훔쳐낸 비밀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게 유일한 증거였습니다.

당시는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해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기고, 독일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의구심, 적개심에 빠져 있던 때입니다. 참모본부는 내부에 독일 첩자가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하루빨리 반역자를 잡아 처단하는 것만이 최선의 수습책이었습니다. 마침 혐의를 받은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반유대 애국주의 신문을 비롯해 여러 신문들이 저마다 정보력과 상상력을 동원해 드레퓌스와 유대 조직의 음모를 고발하는 가운데 군법회의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3년 후 프랑스는 페르디난드 에스떼라지라는 진범을 찾아내고도 군의 위신을 위해 진실을 덮었습니다. 드레퓌스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 증거들이 드러나며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1902) 등 프랑스의 양심이라 불리던 인사들이 재심을 요구했으나 언론은 오히려 “유대인들의 새로운 음모가 시작되었다”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국민들도 진범을 ‘유대인에 의한 순교자’라 두둔하며 “유대인을 죽여라. 에밀 졸라를 죽여라. 프랑스군 만세!”를 외쳤습니다.

1906년 최고재판소가 비로소 밝혀진 진실에 따라 드레퓌스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프랑스 사회는 10여 년 동안 맹목적인 애국심과 배타주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극한 논쟁과 대립, 혼란 속을 헤매야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출범한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은 연합국에 대한 배상, 혹심한 경제난으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실의와 분노, 피폐한 생활에 따른 고통과 불만을 틈타 나치(Nationalsozialistische Deutche Arbeiterpartei,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히틀러는 반대세력을 숙청해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독일이 겪는 불행의 탓을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에게로 돌렸습니다. 국민의 눈을 가리고 전승국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습니다.

1935년 마침내 히틀러는 패전국의 멍에였던 베르사이유조약을 파기하고, 곧이어 폴란드 침공을 신호로 보복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미 견제 세력도 비판의 목소리도 사라진 가운데 독일 국민들은 눈뜬장님처럼 히틀러와 나치의 광기에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나치 이념을 교육받으며 자란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의 청소년들은 나치의 홍보, 시위, 선동에 동원되었고,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렸습니다. 나치의 광란으로 세계는 5천 만 명 이상의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2차 대전의 참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2차 대전 종전과 동시에 본격화한 동서의 이념 분쟁은 1950년대 자유 세계의 보루라 할 미국 땅에서 희극적인 집단 히스테리를 연출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에 편승해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1908~1957)가 일으킨 ‘매카시 선풍’입니다.

민주당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집권 시절이던 1950년 2월 그는 “국무부가 온통 공산주의 첩자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해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든 조금만 의심이 가면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습니다. 노동자, 가톨릭교도, 소수민족, 일부 공화당원들이 매카시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물론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효과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카시즘의 소용돌이 속에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증거도 없이 간첩, 또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직장과 사회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끝도 없고 근거도 없는 마녀사냥에 넌덜머리를 낸 언론과 시민들의 외면으로 매카시즘은 4년여 만에야 비로소 끝장이 났습니다. “육군 내부에 빨갱이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매카시의 주장으로 진행된 1954년 6월 상원의 육군 청문회가 허망하게 끝나자 상원은 그해 12월 매카시의 의원직을 박탈했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시도 때도 없이 집단 히스테리나 광기의 시대가 왔다 가곤 합니다. 프랑스와 독일과 미국. 서구 문명의 중심에 있는 나라들을 휩쓸고 간 광풍이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손쉽게 감정에 휘둘리는지를 절감하게 합니다. 이 같은 인간의 약점을 악용하는 무리들의 선전과 선동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회도 갈등과 분열과 대립과 혼란의 홍역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정부가 일제 식민통치의 상처를 곱씹으며 반일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어느 지자체에서는 일본에서 유래된 가이즈카 향나무를 뽑아냈다고 합니다. 그럼 일본인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벚나무는 우리 산야에서 그대로 번성해도 괜찮은지, 남부지방에서 풍요한 수림을 이루고 있는 편백, 삼나무도 뽑아야 하는 건 아닌지, 아키바레 쌀과 후지 사과, 그밖에 일본에서 개량된 수없이 많은 농산물은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느 지자체에서는 지난 삼일절 기념 음악회 연주곡목에 애국가 작곡자인 안익태(安益泰, 1906~1965)의 ‘한국환상곡’을 넣었다가 논란 끝에 빼버렸답니다. 친일 시비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에 살아남은 가족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애틋했던 그의 나라 사랑과 애국 행적을 전하곤 했지만 정작 그는 사후에도 정권의 입맛에 따라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배신자가 되었다 하는 참담한 신세입니다.

소련 공산 독재하에서 당의 요구와 예술가적 신념 사이에서 번민하고 자포자기했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y Shostakovich, 1906~1975)가 생각납니다. 그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음악이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작품들만은 행적과는 별개의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홍난파(洪蘭坡, 1898~1941)를 비롯해 아름다운 선율로 우리의 동심과 정서를 키워준 수많은 우리의 음악가들은 오늘날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친일 딱지가 붙은 채 예술작품마저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일제가 세운 학교에 다닌 것도 친일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긴 일본 육사를 졸업한 게 친일이라면 동경제대나 경성제대를 졸업한 것도 당연히 친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일제 치하에서 숨 쉬고 살았던 것만도 친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몇 세대 이전에 청산했어야 할 묵은 이념과 감정에 사로잡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성을 소모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의가 뻔한 권력욕에 반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상대의 과실을 집요하게 들추어내 국민의 분노를 확대 재생산하며, 스스로 미래로 향하는 발목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상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폭발하면 이성이 마비되고 폭력을 부르게 됩니다. 얼마 전 문막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말로만 듣던 이포보를 찾았다가 아연실색했습니다. 이포보 안내판이 누군가에 의해 칼로 짓이겨져 있었습니다. 한동안 보의 물 빼기로 논란을 빚더니 현지 농민들이 붙여 놓은 ‘수문 개방 반대’ 현수막도 갈가리 찢겨 있었습니다.

4대강 보(洑)는 건설에도 해체에도 많은 논란이 따르고 있습니다. 수원과 수질 관리, 경제성에 여러 이론이 무성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 편을 든다고, 또는 반대한다고 드러내는 우리네 폭력성은 너무나 야만적입니다. 사회질서를 위해서라도 철저히 단속해야 할 터인데 웬일인지 외면하고 돌아앉은 우리의 공권력도 참으로 한심해 보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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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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